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치료

이지훈(컴공 14)

 

“최면술 자체는 흔한 기술이지. 그런데 말야, 아무리 최면 상태에 빠트린다고 해도, 그 사람의 기본적인 윤리관을 바꿀 수는 없어. 즉, 살인을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암시를 거는 건 불가능해.”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1997) 중에서

영화는 너무나도 즉물적인 매체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 자체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다른 상상을 하게끔 하거나, 한편으로는 시나 문학처럼 비치는 대상으로 다른 것을 암시하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이것은 지금 주머니에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카메라로 눈 앞의 물체를 찍어보면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눈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컨대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걸 스마트폰으로 찍는다면 그냥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이 찍힐 뿐이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단순하게 렌즈에 들어오는 빛을 담는 기계장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더 사람 시점으로 말하면, 눈 앞에 보이는 시야의 일부를 일정 시간동안 사각으로 잘라내서 저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바로 영화를 만드는 카메라란 기계의 특성이다. 발명된지 120년이 흘러서 사람들은 망각했지만 실은 처음엔 영화는 곧 영상과 동의어였고, 실제로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을 정면에서 찍은 것으로 시작된 뤼미에르 형제의 일련의 최초의 영화들과 현 시대의 유튜브 쇼츠와 같은 짧은 영상들은 현대인들의 눈에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 앞의 사물들을 그대로 담아내는 영상으로부터, 현재의 영화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과 자동차의 예를 떠올려보자. 화면의 오른쪽에서 재빠른 속도로 한 사람이 튀어나와 횡단보도를 걷던 어느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낚아채더니 왼쪽 화면 밖으로 들고 도망친다. 길거리에서 별안간 소매치기를 당한 그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피해자는 도둑을 쫓아 달려나가며 왼쪽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이제 다소 영화 같아 졌다. 단편 영화의 한 숏1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다. 여기서 추가된 것은 이야기, 즉 각본이다. 초기의 영화는 문학과 연극에서 이야기를 가져와서 자신의 구성요소로 활용했다. 이는 머지않아 시나리오라는 형태로 다듬어지고 영화의 요소로서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또는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소매치기가 피해자를 습격하는 장면2을 횡단보도 전체가 보이도록 찍고, 소리를 지르는 피해자의 얼굴을 화면 중앙에 오도록 구도를 달리 해서 따로 찍는다.3 이후 다시 원래 구도로 돌리고 소매치기와 피해자는 화면 왼쪽 밖으로 달려나간다.4 이후 숏 1과 숏 2, 숏 3을 이어 붙인다.5 이러면 소매치기 당한 사람의 심정이 더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지게 된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6

한편, 빨간 불에 정차해서 대기 중이던 한 자동차에서 운전사가 내린다. 그러더니 소매치기를 잡는걸 도와주려 왼쪽 화면 밖으로 달려 나간다. 여기서 찍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 것은 그 운전자는 배우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는 점이다. 제대로 촬영 장소가 통제되지 못한 환경에서 외부인이 끼어들게 되어 엑스트라들은 모두 당황하고 어색한 시선처리를 보낸다. 하지만 그 모습이 잡힌 화면은, 진짜인줄 알고 끼어든 운전자와 다소 어수선하고 어색한 엑스트라들의 술렁거림에 의해 더 사실적으로 보이게 된다. 이는 영화 촬영에 유동적 요소와 길거리 로케이션을 끌어들인 것으로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을 거쳐 현재의 일반적인 영화 작법에도 큰 영향을 끼친, 영화가 우연을 활용하는 작법이다.7 그런데, 지금까지의 세가지 촬영의 방법론에는 공통되는 것이 있다. 화면에 비치는 것 말고도 비치지 않는 것으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부분이다. 예컨대 여태까지의 예시에서 소매치기가 오른쪽 화면 밖에서 나타나서, 왼쪽 화면 밖으로 나가는 것은,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 주요 피사체의 지갑을 훔쳐서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의미를 형성한다. 만약 처음부터 소매치기를 따라 카메라를 이동시키고, 이후에 피해자의 비명은 사운드로만 처리해서 화면 밖으로 치워버리고, 달아나는 소매치기를 계속 카메라가 따라가며 찍는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그 영화는 소매치기가 주요 피사체로서 그가 소매치기 행위를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8 같은 상황9이라도 카메라가 어떤 피사체를 화면 안에 들여놓기로 택하고, 어떤 피사체를 화면 밖으로 밀어내기로 택하느냐에 따라 숏이 전하는 의미는 이렇게나 상이해진다.

즉, 결과적으로 영화는 본질적으로 환원해보면 ‘무엇을 찍을 것인가’와 ‘무엇을 찍지 않을 것인가’ 두 개의 선택의 나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도쿄대 총장을 역임한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론이며, 그의 영화 강의를 듣고 영화 감독이 된 일명 ‘릿쿄대 뉴웨이브 세대’,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10, 스오 마사유키11, 그리고 이후 도쿄예대 영상원과 영화 교육기관 영화미학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강의를 듣고 영화감독이 된 하마구치 류스케12나 미야케 쇼13에게도 이어지는 일본 독립영화계 일부의 공통된 영화에 대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영화가 어떤 사회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더 나아가서 보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14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관념을 물화시킨 세트, 배우, 대사 등등의 일부를 카메라를 이용해 사각으로 잘라내는 행위다. 이후 영화가 유통되고 불특정 다수들에게 선보이는 과정에서 사회와의 수많은 상호작용이라는 함수를 거치며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예상할 수 없는 형태로 수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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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쩔 수 없이 영화의 줄거리를 써야 할 때가 왔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이 글의 예상 독자는 <큐어>를 시청한 사람에 맞춰져 있지만, 2004년에 한국에서 소규모로 개봉한 후 dvd로만 잠깐 나오고 현재까지 스트리밍 및 vod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15, 또 이 글을 읽기 위해서 120여분의 시간을 영화에 투자할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물론 이 글을 통해 <큐어>에 흥미를 갖게 되어 보게 된다면 그보다 더할 나위는 없다. 하지만 접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므로.

형사 타카베 켄이치에겐 정신질환을 앓는 아내가 있다.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일상적인 생활에는 일견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나 그녀는 자주 빈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저녁 준비로 생고기를 접시에 올려 놓는 등의 행동으로 그를 고민케 한다. 타카베는 이 때문에 집에서 세탁을 하지 못하고 세탁소에 매일 찾아가고, 말은 하지 못해도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며 식당에서도 거의 밥을 먹지 못한다.

한편, 어느 날 일련의 수수께끼의 연쇄 살인이 발생한다. 범행 수법이 동일하다. 피의자가 피해자를 죽인 뒤 칼이나 날카로운 물건으로 목에 X자를 긋는 것이다. 그리고 피의자들은 모두들 범행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경찰에서 붙잡히고, 범행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나,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왜 죽였는지 모르겠다는 말만을 반복한다. 수사 도중 피의자들과 만났다는 공통점이 있는 청년 마미야 쿠니히코를 용의자로 체포해 심문하지만 마미야는 자신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리고, 경찰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당신은 누구냐,’ 등을 읊조리기만 한다.

타카베는 마미야를 심문할수록 그의 말에 휘말려 간다. 하지만 형사로서의 의무도 다해 친구인 정신과 의사에게 자문하여 이윽고 마미야의 최면 기법이 근대의 사악한 이교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다. 허나 그 후, 친구는 서서히 이상해지더니 스스로를 결박한 후 X자로 목을 그어 자살해버린다. 아내의 정신병은 더욱 심해져서 타카베는 견디다 못해 그녀를 요양소에 입원시킨다. 요양소에서 의사는 타카베를 보고 말한다. ‘제가 보기엔 당신이 더 병든 것 같아요.’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마미야는 감금된 정신병동에서 탈출한다. 타카베는 홀로 그를 추적해 이윽고 폐허가 된 창고에 다다른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마미야에게 타카베는 총을 쏘아 죽인다. 그리고 놓여있는 낡은 축음기. 깨진 창문에 붙은 커튼이 펄럭이고 타카베는 홀로 앉아 축음기를 켠다. 이전에 본 적 있는 근대 이교도가 녹음한 알 수 없는 주술. 컷이 바뀌고, 아내가 입원한 정신병동의 복도에서 간호사가 걸어간다. 휠체어가 움직이는 소리. 간호사는 뒤를 돌아보고, 리버스 숏으로 어두운 복도에서 목을 엑스자로 그여 살해당한 아내가 나타난다. 빠른 컷 전환. 타카베는 이전에 음식을 거의 삼키지 못했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달라진 표정으로 접시를 맛있게 비운다. 그릇을 가지러 온 종업원 앞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타카베.16 숏이 끊기지 않고 쭉 이어지는 롱 테이크, 그릇을 가져가 정리하던 종업원이 그녀의 상사로부터 무언가 꾸중을 듣는다. 백색소음과도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의 잔잔한 음향 사이에서, 그녀는 이내 잠시 혼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천천히 걸어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칼을 집어든다. 그 순간 거리를 비추는 배경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며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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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가 <큐어>에서 무엇을 찍고, 무엇을 찍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어떤 효과를 냈는지를 살펴보는 건 어렵지 않다. 그저 화면을 집요하게 응시하면 된다. 눈이 받아들이는 시각 정보가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지, 아니, 사실 그보다는 감독이 어떤 효과를 노렸는지를 영화의 내부 속으로 들어가 살펴보도록 하자. 영화는 첫 10분으로 결정된다고들 한다. 거기서 조금 더 줄여서 영리한 감독은 영화의 첫 시퀀스18만으로도 영화의 분위기와 얼개를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게 노력한다.

이 영화의 첫 숏은 넓고 하얀 방에 탁자가 있고, 의자가 두 개 있는데, 한 의자에 아내가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이다. 아내는 푸른 표지의 책을 들고 낭독하는데, 이어서 백의 차림을 한 선한 인상의 정신과 의사가 맞은편으로 다가와서 의자에 앉는다. 두 사람에게는 너무 넓고 공허해 보이는 방은 앞으로 전개될 싸늘한 사건들을 직감케 한다. 두 번째 숏은 책과 아내의 얼굴을 화면에 꽉 채워지도록 잡는다. 이어지는 낭독. 이윽고 책을 덮고, 탁자 위에 내려놓는데, 이 때 컷이 바뀌며 흰 탁자 위에 도드라지는 파란 책의 표지가 보인다. 제목은 ‘푸른 수염’. 이 책은 연쇄살인에 관련한 옛날 이야기이다.19 한편으로는 푸른 수염이라는 별명을 지닌 실존 연쇄살인마도 있었다. 노골적인 앞으로의 이야기의 암시. 물론, 이에 대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관객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을 예상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의사가 아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고 안부를 묻는 숏과, 의사의 상반신을 잡는 바스트 숏을 잇고,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바라보는 아내 역의 배우에게 딸이 푸른 수염을 죽인다는, 책의 내용을 대사로 말하게 해, 관객들은 무의식 속에서 불길함을 느낀다.

여기서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갈 수 있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전에 언급한 이 글을 읽고있는 독자는 이미 인물들의 정체와 결말까지 당연히 알고 있지만 만약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처음에 나오는 공허한 흰 방과 거기에 앉아있는 한 여자를 마주하고 어리둥절해 할 것이 틀림없다. 처음부터 경찰서와 형사, 혹은 살인 현장을 카메라로 비춘다면 이 영화의 윤곽을 관객들이 단숨에 알아챌 수 있을텐데 감독은 다른 부분을 먼저 찍어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는 형사와 살인자가 등장하는 스릴러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일반적인 현대인의 병리 현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영화 시작 부분에 아직 익명인 한 사람을 등장시켜, 그녀가 품고 있는 불가사의한 정신병과 살인에 대한 책을 카메라로 비춤으로써 익명의 현대인들이 품고 있을 살인 충동과 정신과적인 질환을 나지막히 암시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특히 절대로 비약이 아니다. 카메라로 무엇을 찍을지, 그 찍은 것들을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해서 감독은 매 순간 장고 끝에 결정을 내려야 하고 영화는 그런 결정들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암시는 관객들에게 전해지면서 산산히 부서진다. 영화의 카메라는 잔혹해서 피사체의 표면을 훑을 수 있을 뿐 거기에 담긴 감독과 스태프들의 의도까지 온전히 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심한 관객들, 특히 평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비슷한 것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일반 관객이라고 하더라도 카메라의 구도와 편집이 기능적으로 유도하는 심리적 불협화음을 무의식적으로 잡아내는 것까지는 간단하다. 그렇기 때문에야 말로 이 시퀀스가 어떤 의미만을 지시하는 시시하고 도식적인 직유가 아니라 이야기 내에서의 역할, 은유로서의 역할, 미술로서의 역할 등을 종합적으로 맡고 있는 영화의 일부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에 실패한 작품이 노골적인 비난을 받는 경우를 접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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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어떤 사회적 함의를 품거나 정치적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앞서 언급했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숏들, 일정 시간동안 일정 시야를 잘라낸 화면들이, 보는 사람들에게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환기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가능하다. 이는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갈구하고,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본인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 안에 두고 재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큐어>와 현대 한국 사회의 어떤 양상을 연결짓고자 하는 충동은 영화로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피해갈 수 없는 덫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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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사회에 어떤 집단적인 과부하가 걸려 있다는 느낌을 받은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대목을 읽으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원래 그랬는데? 라고.21 실제로도 그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한 개인이 사회의 혼란함과 과부하에 의해 촉발된 혼란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졌다는 점 또한 사실에 가깝다. 2021년 기준 우울증 치료를 받은 사람이 1년간 100만명을 돌파했고 최근 3년간 2배가 늘었다는 국민건강보험 자료가 있다. 또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2020년 성인남녀 2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를 보면 2019년에 행해진 조사에 비해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15.2% 줄었지만 분노는 2.2배, 공포는 2.81배 증가했다.22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해 모두가 상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 교류가 가속되었다. 동시에 감정의 교류도 가속된다. 소셜 미디어는 이런 정보와 감정의 즉각 전달에 최적화된 매체이다. 어느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즉시 해쉬태그를 달고 그에 반응하는 수많은 일차적인 감정이 익명을 방어막삼아 발설된다. 머지 않아 누군가가 해당 사건에 부정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사건을 주관적으로 축약하고 비꼬는 코멘트를 덧붙이면 사회망을 타고 그 의견은 전염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반대로 그 주제에 대해 긍정하는데, 원래의 부정적인 의견을 인용하면서 일견 호쾌해 보이는 ‘일침’을 남긴다. 이제 투기장이 열린다. 싸움의 승자는 누가 더 키보드 배틀에 어울리는 냉소적인 수사를 구사했는지, 상대의 말꼬리를 잘게 산산조각냈는지로 결정되고, 이는 다른 이들의 추천수23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둘은 각자의 승패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의견을 절대 굽히는 일이 없고,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을 재빠르게 차단하고 자신들의 계정에서 누구 들으라는 식의 독백을 새벽 쯤에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면 처음 사건은 더 이상 엄두에도 없고 서로간의 감정싸움과 너절한 냉소, 때때론 익명의 가면을 쓴 원색적인 비난, 등등과 그것들이 남긴 상흔뿐이다. 문제 해결, 또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으로 토의로 이어지는 바람직한 공론장의 형성은 소셜 네트워크의 이런 문화에서는 꿈도 꿀 수 없다.

더한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을 한 개인이 오롯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혼란스럽고 피로가 과중된다는 것이다. 처음 한 두 번은 이런 의견 주고받기에 참여해 개인으로서 한 두 마디 덧붙일 수도 있겠지만, 1)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 2) 나와 전체적인 의견의 방향은 같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의견이 갈리는 사람 3) 나와 의견은 같지만 험한 말로 그걸 주장하는 극단주의자, 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과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고, 그 대면에서 소모되는 에너지와 가해지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며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정신에 해를 입기 쉽다. 혹은 저런 유형의 사람들, 그 중에서 특히 험한 말로 자신의 범위 내에 있는 사회망을 적극적으로 선동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저급하고 날카로운 말로 과시하려는 3과 같은 극단주의자로 전락할 가능성 또한 높다.

이 일련의 현대 한국 사회의, 대개는 인터넷으로부터 비롯된, 피로와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극단주의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을 상정한다. 하나는 인터넷과 자극적인 미디어에서 완전히 눈을 떼고 절식하는 것이다. 필요 이상의 자극적인 매체와 행위를 일절 멀리하고 수도승과 같은 삶을 지향하는 ‘도파민 디톡스’는 최근 몇 년 새 캘리포니아의 IT기업 고위직들을 위주로 퍼져나가고 있다.24 뇌에 들어오는 자극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고, 동시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도파민 수용체의 민감도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과학적 설명을 기반으로 한다. 두 번째는 전염되는 분노와 광기에 굴종하고 그들의 일부가 되어 분노와 광기를 재생산하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어느 한 쪽 입장에 서서 자신과 같은 극단주의자들과 함께 경계를 긋고,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 타인들,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개인들까지도 손쉽게 악마화 한 후 모욕적인 언어로 조롱하는 행위 말이다.25 더욱 극단적인 경우엔 이들이 집단화되어 온라인에서 조직적인 행동을 할 뿐만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와 실체화된 폭력의 형태를 띤다. 이는 사회적인 혼돈을 더욱 가속화하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개인에게는 소속감을 갖게 하고, 일종의 긍정적인 형태의 사회 발전에 자기가 이바지한다는 환상을 심어주기까지 한다. 반대로 말하면 개인에게는 점차 나빠져가는 사회에서 이런 인터넷 발 극단주의에 동참함으로써 어떤 이정표 내지 보금자리를 찾았다고 느끼고 그로부터 정신치료적인 만족감26을 느낄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집단간의 분열을 초래하고 갈등을 악화시키는 세력들의 세가 늘어나는 좋지 않은 현상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행해진 수많은 군중심리 연구를 통해 확인됐다. 인간은 보통 혼자보다 집단적 사고를 할 때 더 위험한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하곤 하며, 분노를 더 상승시켜 반사회적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계기가 되곤 한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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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두로 돌아가보자. 최면술을 이용해 타인이 살인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지, 친우인 정신과 의사 사쿠마에게 타카베는 오후의 대학 병원 밖 벤치에 앉아 물어보는 대화 신이다. 그 때 사쿠마가 돌려준 대답. 불가능하다. 사람을 최면 상태에 빠트려도 그 개인의 기본적인 윤리관까지 바꿀 수는 없다. 살인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살인을 저지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관객은 지금까지의 시각 정보를 바탕으로 영화의 핵심과 맞닿게 된다. ‘어? 하지만 최면술에 걸려서 가족을, 동료를, 모르는 사람을 살해하는 것들을 지금까지 영화는 분명 보여줬는데?’ 즉, 이 영화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의지로 저지른 것이다. 마미야가 한 것은 그들이 미처 겉으로 꺼내지 못한 그 악의를 최면으로 일깨워 준 것 뿐. 살인이란 피의자들에게 있어서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거해버리는, 극단적이며 최종적인28 형태의 치료(큐어)였던 것이다.

극단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를 내세우는 집단에 스스로의 자아를 내맡기고 그 일부가 되는 것은 안락하다. 소파에 앉아 점멸하는 담뱃불을 보면서 최면 상태에 빠져드는 것과도 같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면에 빠져들고 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하하고 극단적인 언행을 서슴치 않는다. 토의는 부재하고 그 대신 말과 글로 타인을 사회나 인터넷 상에서 살해하는 범죄행위만 범람한다. 그러면 마음은 다소 편안해 지는 걸까? <큐어>에서 최면에 걸려 치료 행위로써 타인을 살해한 사람들은 결국 텅 비어버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으로 끝난다. 무면허 최면술사의 도움을 받은 자가 치료는 파탄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한 가지,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주 특징은 전염이기도 하다. 다른 영화들에 대한 스포일러를 어쩔수 없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앞으로 이야기할 이 부분은 건너뛰고 읽어주길 바란다.29 <카리스마>(1999), 광기를 퍼뜨리고 주변의 생물들을 말라 죽게 하는 나무 카리스마는 산림 공무원에 의해 뿌리 뽑힌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고립된 산지에서 도시로 나오게 된 카리스마가 산림 공무원들을 미치게 만드는 걸로 시작해 도시 전체를 혼란과 폭동의 지옥도로 빠지게끔 한다. <회로>(2001), 고독이 인터넷을 통해 전염된다. 이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은 유령으로 변하고, 이윽고 검은 재로 산산이 쪼개져 모두가 사라진다. <절규>(2006) 과거의 개인적이고 치명적인 사건을 잊고 은폐하려고 하는 현대 도쿄의 불특정인들에게 빨간 옷을 입은 귀신이 찾아오고, 그 귀신을 꿈 속이나 무의식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이내 동일한 수법으로 살인 사건을 저지른다. 결말의 트래킹 숏30에서 다소 짧게 암시되지만 이 귀신은 결국 모두에게 찾아와서 도시가 마비된 것으로 보인다.

소셜 미디어는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극단적인 주장을 전염시킨다. 합리적인 자성의 목소리는 덜 즐겁고, 눈에 쉽게 띄지 않아서 정화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인터넷에 상시 연결되는 현재 환경에서 모두가 타인의 불안과 분노에 쉽게 전염된다. 이는 사회적 갈등과 분노를 부르고, 합리적인 사고와 목소리를 강제로 억압한다. 모두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기에 인터넷은 어느새 현실로 범람한다. 집단적인 광기와 극단적인 이념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대로로 나선다. 도시는 마비될 것이다.

결국, 언급된 모든 상기의 영화에서 그렇듯, 어떤 형태로든 이대로 가면 세상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저는 이 사회에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구로사와 기요시는 말한다.31

 


주석
1) 카메라의 시선이 시작되어서 끊기기 이전까지, 영화의 최소 단위
2) 숏 1
3) 숏 2
4) 숏 3
5) 신 1, 신은 여러 숏을 이어 붙인 편집의 한 단위이다
6) 이것의 원문은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a long-shot.’인데, ‘인생은 클로즈업6-1)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롱 숏6-2)으로 보면 희극이다.’로 직역된다. 이 명언이 오늘날까지도 널리 회자되는 이유는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채플린의 날카로운 통찰 덕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클로즈업으로 찍으면 인물의 감정을 더 생생히 전하는 주관성이 강조되고, 롱 숏으로 찍으면 반대로 객관적인 구도가 강조된다는, 촬영의 기술적 측면에서의 기본 원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인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6-1) 피사체를 매우 가까이서 들여다 찍는 카메라 구도
6-2) 피사체의 전신이 나올 정도로 먼 거리에서 찍는 카메라 구도
7) 당연히 실험영화가 아닌 이상 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현대 영화는 드물다.
9) 앞뒤에 어떤 숏을 붙여 편집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지 않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고 물론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예라는 것을 감안해 주었으면 좋겠다.
9) 전지적 시점으로 본다면.

10) 대표작 : <유레카>(2000), <새드 배케이션>(2007)
11) 대표작 : <쉘 위 댄스>(1996),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12)
12) 대표작 : <아사코>(2018), <드라이브 마이 카>(2021)
13) 대표작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주온 : 저주의 집>(2020)
14) 물론, 그걸 시도한 감독들이 있었다. 예컨대 홍콩-한국 합작 무협영화 <당수태권도>(1972) 위에 무단으로 프랑스어 녹음을 덧붙여 68운동과 마르크스주의 영화로 변신시킨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1973)는 상황주의 인터내셔널14-1)운동 하에서 일어난, 정치적 영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영화는 2019년 부천 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유튜브에도 자막본으로 올라와, 45년만에 한국 영화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마이너한 영화 말고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2회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작품들, <, 다니엘 블레이크>(2016)이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을 정치적이라고 말한다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포괄적인 형용에 기인한 오류이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을 영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빈곤층들의 일상이나 아일랜드 독립 운동을 재현한 2시간짜리 사극으로 보아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봐도 작품을 읽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정치적 구호 외에는 별도의 작품을 읽는 통로가 존재하지 않으며, 원래 있던 멀쩡한 영화를 무단으로 더빙해 완전히 다른 영화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예술 이론의 정치성과 맞닿아 있기도 하기 때문에 더더욱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그렇기에 사실 이건 영화가 아닌, 영화의 형식을 빌린 미디어아트, 또는 다소의 비꼼을 담는다면 정치적 선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전통적인 영화평론과 매체에서 다루어지기 보다는 미디어아트나 연대 미술을 다루는 글들에서 자주 인용되었고 따라서 오랜 시간동안 한국 영화계에는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었다.
14-1) 프랑스에서 50년대부터 시작된, 상업화된 모더니즘 예술을 타파하고 정치성과 이념성을 강조한 반체제적 급진적 예술 사조
15) 그렇기에 영화 팬들은 가끔 토렌트와 웹하드가 씨네필의 필수요소라는 농담을 자조적으로 던지곤 한다.
16) 서로 마주보는 두 인물을 찍을 때 사용하는 두 숏 중, 반응하는 인물을 찍은 숏
17) 2010년대까지 일본은 식당 내에서의 흡연이 합법이었다.
18) 신과 신을 이어 만든, 하나의 연속된 시공간 내에서 의미를 가지는 영상의 단위
19)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동화라지만
20)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면 관객은 소격 효과를 느끼게 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일본 영화의 고전시대 거장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이런 숏이 자주 등장했고, 이런 부자연스러움에 주목해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 세계를 재해석하는 평론이 80년대 이래로 자주 쓰였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승인 하스미 시게히코도 그런 평자 중의 한 명이었다.
21) “
지금 지구는 엉망이다. 그러나 과거에도 항상 엉망이었다. 행복했던 시절 따위는 한번도 없었다. 그냥 지난 시절만 있었다. 그래서 난 손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날 쳐다보지 마라. 그냥 이렇게 됐구나."”, 커트 보니것, 나라 없는 사람, 문학동네, (2005)
22) 장윤서, "코로나19 재확산 이후 분노 커져10명 중 8"한국사회 위기," 조선일보, 202098.
23) 매체에 따라 좋아요, 리트윗 수, 피드 수 등등.
24) 아이러니하다. 많은 사람들을 소셜 미디어 중독으로 만들어 끊임없이 광고를 노출시키고 그로부터 수익을 벌어들이는 모델을 개발한 빅테크 기업들의 주요 인사들이 오히려 본인들은 인터넷 세상을 멀리하다니. 그런데 실로 더 아이러니한 지점은 도파민 디톡스가 바로 SNS를 통해 미국 외의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신문 20191119<“모든 자극과 쾌락 중단” ‘도파민 단식눈길>등의 기사를 참고하면 된다.
25) 구체적인 예가 없지만 누구나 관련된 예시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구체적인 예시를 들지 않냐면 특정 이념이나 사건을 적시하면서 관련된 비평을 적는 것은 이제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어떤, 지식인의 기사도 정신 같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에 순순히 따를 경우 너무도 허무맹랑하게 나머지 글 전체가 그 이념이나 사건에 대한 글쓴이의 (편향된) 의견을 위해 종속되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반응, ‘글이 너무 정치적이야’. 또한 그럼으로써 전혀 불필요하게 반대 입장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래도 보편상식을 어기는, 비난해 마땅한 이런 유형의 군중들을 꼽자면 예를 들면 빌 게이츠 베리칩 설을 믿는 안티백서, 인터넷을 무기로 거짓된 집단 의견을 형성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사이비 종교 광신도 등이 있다.
26) 또는 큐어.
27) 안진용, "“‘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러나열패감SNS 군중심리 분노 폭발시켜”" 문화일보, 2021107.
28) 또는 돌이킬 수 없는.
29) 물론 이 문단은 이 글의 종결부이며 주요 결론과 직결되어있다.
30) 피사체가 되는 사람이나 물체를 카메라의 횡이동으로 포착하는 구도
31) 서울아트시네마 기획전 <새로운 바람일본 영화의 현재> 2021321, <스파이의 아내> 상영 후 온라인으로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 중에서


 

이지훈(컴공 14) 학우.
이지훈(컴공 14)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