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과거 조선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그 성균관은 현재의 대학교와 얼마나 달랐을까? 성균관에서도 지금처럼 학생회가 존재하였는데 이를 ‘재회’라고 했다. 재회는 자치활동을 위해 구성된 학생회로서 상당히 권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학생회장인 ‘장의’는 동, 서재에서 각 1인씩 2인을 선출했는데 현임 장의의 추천과 전임 장의들의 합의에 의해 뽑는 간접 선거제였다. 이로 인해 장의는 서울출신 집권층의 자녀에게 많이 배분되는 현상이 있었다. 즉,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학생들의 학업성적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또한 성균관의 유생들은 지금의 학생운동과 같은 사회참여도 있었다. 유소(儒疏)는 상소행위로서 여론을 조성하는 것으로 대체로 시비를 가리는 비판적 의사 표시 행위였다. 유생들은 ‘유소’에서 해결이 되지 않을 경우 성균관을 나가버리거나 식당을 들어가지 않는 등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는 성균관이 지배집단의 요구와 같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정립하려 한 것이다. 또한 유생들의 자율성이 크게 신장됐던 현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풍습에 있어서 좋지 않은 것들도 존재했다.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는 면책(面責)의 풍습이 있었는데, 선배가 후배를 부르면 동, 서재의 재직(심부름꾼)들이 호출당한 자가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신참을 에워싸고 함부로 성명을 불렀다. 이는 현재에서 본다면 군대에서 신병교육과도 비슷한 것이다. 선조 때 금령(禁令)을 내렸으나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교관천시풍조가 있었다. 세종 후기부터 성균관 교육은 침체돼 교관직은 관리들의 유배지와 같은 한직으로 인식됐다. 유능한 교관이 부임해도 곧 전직이 됐으며 때로는 환임을 요구해도 거부되기 예사였다고 한다. 또 성종 때 이르러서는 성균관 유생들이 교관의 학문적 자질과 인격을 희롱하는 시와 글을 쓰고 체벌에 대한 불만을 품어 권당(捲堂:식당을 들어가지 않음)까지 감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지나친 학생중심의 운영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학생자치권이 매우 강한 교육제도였기 때문에, 교수진들의 권위가 서지 못했던 데에도 그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라는 기숙사에서 거주했다. 비용은 국가가 부담했으며 관생들은 등불기름값으로 15문전(文錢)씩을 받았다. 그 외에도 학용품인 종이와 필묵 등도 지급받았다.  동재(東齋)는 첫째 방이 약방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제일방(右第一房) △장의방(掌議房) △진사칸 △하일방(下一房) △하종방(下終房) △하재(下齋)등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서재(西齋)는 서일방(西一房), 장의방(掌議房)순 이었다. 총 28방으로서 한방에 2인씩 거하되 가급적 면식이 있는 사람들끼리 동거했으며, 방이 모자라서 반촌(泮村)에 기식하거나 향관청(享官廳)에서 기식하기도 했다.

식사시간은 성균관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식고(食鼓)를 3회 치면 당정(堂庭) 앞에 모여 양재(兩齋)의 재생들이 줄을 서서 상읍례를 행했다. 식당에 입장하면서 도기를 쓰는데, 수결(手訣-서명)로 했으며, 조석으로 해야 원점 1점이 됐다. 말하자면 식당에서 출석을 불렀던 것이다. 이는 학생들의 사회 참여 방법으로도 이용돼 단체로 식당출입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의사를 나타내기도 했다. 반촌은 일종의 대학촌으로 주로 성균관 소속의 노비들이 살고 있었다. 또는 입재하지 못한 유생들이 하숙을 하기도 했다. 성균관 내에서는 오락을 금하였기 때문에 유생들은 바둑이나 장기 등을 둘 수 없었으므로 향관청이나 반촌으로 향했다.

박원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