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캠 만남- 정재환(사학 00) 동문

기자명 조영창 기자 (whdudckd1004@skkuw.com)

사학 박사, 한글 지킴이, 희극인, 사회자. 모두 정재환(사학 00) 동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이다. 지난 달 26일 ‘성균인문의 날’ 행사 사회를 마치고 나온 그를 만났다.
“비도 오는데 사랑방에 앉아 이야기 나눌까요? 경영관 앞에서 볼까요?” 10년 넘게 학교생활 한 그에겐 우리 학교 곳곳이 학우들만큼이나 익숙해 보였다.
경영관 강의실에 마주 앉아 스토리 있는 인생을 듣고 싶다고 했더니 “스토리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 정 동문의 삶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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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중퇴에서 박사까지

“중학교 때 까진 공부를 좀 했죠.” 친구들과 어울려 개그도 하고 노래도 하다 보니 공부를 게을리했다고 한다. 서울공업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중퇴했고 검정고시 합격 후 3수 끝에 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에 들어갔으나 입대와 이른 결혼으로 자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일찍 결혼을 하게 돼 가장의 책임을 지기 위해 방송에만 몰두하기로 했어요.” 1979년 그룹 ‘동시상영’으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후 1983년 MBC ‘영 11’을 거쳐 1980년대 후반 각종 개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다. 방송 활동을 하는 중에도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방송 활동을 하면서 그의 학구열은 여전했고 방송을 마치고 나면 남는 시간엔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독학으로는 한계를 느낀 그는 대학에 입학해 학문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침 성균관대학교에서 특별전형이 시행되어 40살 늦깎이 대학생으로 우리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2000년에 입학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3년 만에 학사과정을 조기 졸업했다. “한 번은 방송국 사무국에서 성적을 열람했었어요. 모든 과목 A플러스인 것을 작가들한테 자랑했더니 한 PD가 너무 공부에만 신경 쓰지 마시고 방송 일도 신경 써달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는 석사과정을 ‘이승만 정권 시기 한글 간소화 파동 연구’라는 논문으로 4년 만에 마무리했다. 석사 학위에서 멈추지 않고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라는 논문으로 6년 만에 남들보다 일찍 박사모를 썼다. “박사학위가 제 목표는 아니었어요. 그저 국어와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아 공부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더라고요.” 현재 그는 우리 학교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역사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고 경기대에서는 ‘한국 현대사’라는 사학과 전공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한글과 사랑에 빠지다

“시간 나는 대로 책을 열심히 읽으면서 국어 공부를 혼자 했어요. 혼자 공부하다 보니 국어의 의미와 소중함을 알게 되더라고요. 한글이 위대한 문자라는 것을 나름대로 깨닫고 난 후부터는 더욱 깊게 알고 싶었고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죠.” 국어에 대한 학문적 열망이 그를 한글 지킴이의 길로 안내했지만,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었다. “1990년대 말에 우리 사회에 영어 공용화가 대두 되었는데 한글의 위기를 절실히 느낀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영어를 공용어로 쓰게 되면 국어는 어떻게 되는가. 그때부터 우리말을 지키고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죠.” 이러한 계기와 성실한 한글 공부로 인해 품게 된 국어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글문화연대라는 시민단체를 만들게 된 것이다. 한글문화연대는 2000년부터 우리 말글을 아름답게 가꾸고 우리 말글살이의 잘못된 점을 바꾸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서 잃어가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고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독창적인 한글문화를 일구고자 활동하는 시민단체다.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시민운동, 문화활동, 학술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글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대학시절 한글 운동을 하는 동아리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 몇몇 마음 맞는 학부생들과 함께 ‘성균관 한글문화연대’라는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졸업한 후까지도 계속 관여하고 싶지 않아 동아리 활동을 자율에 맡겼는데 2년 후 바로 사라져서 무척 아쉽더라고요.”
현재 그는 한글문화연대의 공동대표이자 한국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다. 한국어 학교에서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어 강의 및 한국의 역사나 문화를 가르친다. 그는 한글문화연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한글 운동에 대해 소개해주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축 성혼(祝聖婚)이나 부의(賻儀) 등 경조사 봉투에 한자로 쓰는 전통이 있어요. 그런데 이 봉투에 한글로 ‘결혼을 축하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로 써도 된다고 생각해요. 한글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한글 경조사 봉투 나눔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죠.” 또한 그는 외래어란 외국어로부터 들어와 한국어에 동화되고 한국어로 사용되는 언어라고 설명했다. △라디오 △컴퓨터 △인터넷 등의 외래어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외국어를 남용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했다. “가능하면 외국어뿐만 아니라 외래어 역시 한국어로 바꾸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런 것이 바로 한글 운동입니다.”

시간도 쪼개고 생각도 쪼개고

그는 방송일과 시민단체 활동을 병행하며 남들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빨리 졸업했다. 그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대학생활은 포기하고 일과 공부만을 선택했다. “학부 졸업 전까지는 친한 친구도 1년에 한두 번만 만날 정도로 빡빡하게 살았어요.” 학교생활 같은 경우에는 과 답사를 몇 번 간 것과 동아리 활동으로 일주일에 한번 학우들과 시간을 보낸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는 평소에 국문 수업과 사학과 전공수업에 관심이 많아 대부분의 강의를 흥미롭게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강의는 우리 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김기봉 교수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를 뽑았다. 그는 자신이 특별하게 잘난 것이 없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열심히 해야 남들만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는 한 번도 제가 ‘일을 잘한다’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어떤 일이든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새로운 도전이라기보다는 늘 하고 싶었던 일이나 분야를 했어요. 일찍이 방송국에 데뷔한 것도, 대학에 들어 간 것도 전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열심히 한 것뿐입니다. 도전하고 정복하는 것이 아닌 그냥 깊게 파고들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는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돼 학우들에게 질 높은 수업하기 위해 철저한 수업 준비를 한다. 방송 분야에서는 그동안의 공백 기간이 길었던 만큼 열심히 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YTN에서 ‘재미있는 낱말풀이’를 7월부터 진행을 하고 있다. 한 달 전부터 대구 KBS의 지역 시사정보 프로그램인 ‘시사 라이브 7’의 진행자도 맡았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방송 사회자로서도 열심히 할 거예요.”
그는 모교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남겼다 “저는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왔고 그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기업의 임원이 되거나 정부의 고관같이 사회적으로 출세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출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요즘 같은 시대에 돈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미래에 대해 불확실성이 크고 남의 눈치도 보면서 미래가 막막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만들어놓은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으로 전락한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해결해주기만을 기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너무 자기를 맞추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세요.” 인터뷰가 끝나갈 때까지 하나라도 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려고 하는 정 동문. 각 분야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매력을 발산하는 그의 삶이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