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인과 일각수』속 동명(同名) 태피스트리

기자명 엄보람 기자 (maneky20@skkuw.com)

테피스트리 연작 <여인과 일각수> 중 ‘나의 유일한 소망’ 작자미상 ⓒwongyintat1993
태피스트리. 이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직물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불립니다. 가로 세로 3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와 정밀화에 버금가는 섬세함까지. 다채로운 선염색사가 그려낸 기적은 뭇 화가의 붓놀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요.
파리 클뤼니 중세 박물관에는 <여인과 일각수>라는 이름의 매혹적인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습니다. 여인이 일각수를 유혹해 길들이는 과정을 묘사한 여섯 점의 연작이지요. 작품 속 여인은 영원한 순결을 얻고자 신성한 존재인 일각수를 손에 넣고자 합니다. 이상을 현실로 바꾸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욕망’이 태피스트리의 주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동명(同名)의 소설 『여인과 일각수』는 이 태피스트리 연작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했습니다. 태피스트리로 인해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그들이 자아내는 사건들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지요. △태피스트리를 주문한 비스트 가문 △제작을 맡은 직공 장인 조르주 △도안을 그린 바람둥이 화가 니콜라. 여기에 여인들의 숨겨진 욕망이 서서히 가세하며 고요했던 책장 위엔 혼돈의 전주곡이 울려 퍼집니다.
원작인 태피스트리와 마찬가지로 소설의 진짜 주인공 역시 여인들입니다. 귀족의 지위를 팽개치고 니콜라의 사랑에 몸을 던져버리려는 비스트 가의 장녀 클로드,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버거운 이름을 내려놓고 수녀가 되고자하는 주느비에브, 직공 장인의 아내로 살지만 태피스트리를 짜고 싶어 하는 크리스틴, 원치 않는 결혼을 망치기 위해 스스로 순결을 버린 직공의 딸 알리에노르까지. 그녀들은 각자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주어진 조건 하에서 할 수 있는 극단을 행합니다. 마치 직물 속에 갇혀있지만 그 안에서만큼은 생동감이 넘치는 태피스트리의 여인들처럼 말이죠.
그녀들 모두 이상에 다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하나의 욕망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법.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욕망과 얽혀들기 마련입니다. 각기 다른 색깔의 소망들이 한 치의 양보 없이 충돌했을 때 그 찬란한 혼돈이란. 소설 속 세상은 코앞에 대고 들여다본 태피스트리 마냥 보는 이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근시안으로 바라본 태피스트리는 광란의 카오스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태피스트리의 무질서는 종래에 하나의 질서정연한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네 세상도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 엇갈리는 욕망은 삶을 어지럽게 만들곤 합니다. 현재의 욕망은 영원하지 않으며, 세상의 더 나은 결말을 위한 일부여야 함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 유한함과 아름다움이 보이지요. 이는 태피스트리의 진정한 가치를 보려면 그로부터 멀어질 줄 알아야 한다는 모순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비스트 가문의 대연회실에 마침내 태피스트리 완성품 여섯 점이 걸리던 날. 파란을 겪은 소설 속 모든 이의 삶도 다시 제자리를 찾습니다. 어떤 이는 꿈꾸던 결말을 맞았고, 어떤 이는 꿈을 버렸으며, 또 어떤 이는 꿈을 꾸던 자신을 잊는 방법으로 여생을 이어나가지요.
여인들은 오늘날 닳고 빛바랜 태피스트리 속에서 평화로이 속삭입니다. 그네들 인생에 생동감 넘치는 순간을 선물한 건 찬란한 욕망이었다고. 하지만 끝끝내 시간을 이기진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