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기자명 차윤선 기자 (yoonsun@skkuw.com)
거실 한 켠에 소파가 놓여 있고 신문을 펼친 어머니가 위엄 있게 앉아 있다. 아버지는 머리와 턱수염을 손질하다가 커피를 대령하라는 어머니의 명령이 떨어지게 무섭게 커피 잔에 찻잔을 받쳐 가져간다. 여동생이 TV를 보고 있는 오빠의 땋은 머리를 가지고 장난치다 참다못한 오빠가 소리친다. “내 머리 좀 내버려 둬!” 그러자 어머니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조용해라. 지금 엄마 신문 읽잖니. 그리고 오빠는 머리가 약하니까 그렇게 잡아당기면 안 돼” 이 상황을 보고 독자들은 약간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남녀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이제 당신을 ‘이갈리아’로 초대한다.

이갈리아는 남성과 여성이 뒤바뀌어버린, 지금의 가부장제를 뒤집어놓은 세계이다. 우선, 책을 펼치면 맨 처음 ‘이갈리아의 용어들’이 쓰여져 있다. △움(wom: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라고 분류되는 성의 인간) △맨움(manwom: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라고 분류되는 성의 인간) △페호(pheho:맨움들이 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입는 옷) 갑작스러운 용어설명에 당혹스러운가? 하지만 이는 이갈리아의 세계로 초대된 당신에게 닥쳐올 충격의 전초전일 뿐이다. 이갈리아는 단지 지금의 남성과 여성이 바뀐 사회일 뿐인데도 생소한 세계로 인식된다.

이갈리아에서는 움이 맨움보다 몸집도 훨씬 크고 사회 활동의 주축을 이룬다. 움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그들만의 특권이어서 월경 축제를 즐기며 완전성을 뽐낸다. 하지만 맨움은 아이를 낳지 못해 불완전한 존재로 여겨지면서 ‘아이를 임신시키는’ 기능을 지닌 인간으로 평가 절하된다. 특히 맨움이 일정한 나이를 넘으면 그들의 성기는 페호라는 가리개로 가려져야만 하고 피임약을 매달 복용해야 한다. 이러한 맨움들의 최고 위치는 부유한 움의 보호를 받으며 그녀의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소설 속 인물을 마음대로 가부장적 사회의 잣대에 놓고 보기도 한다. 그러다 ‘아차, 여기서 움이 여성을 뜻하는 것이었지’하고 혼란을 느낀다. 우리에게 너무도 와 닿지 않는 세계이기에 소설에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부장적 세계에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움과 맨움만 살펴봐도 맨움은 움의 한 종류라는 의미를 내포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우리 세계의 맨(man)과 우먼(woman)과 비교해 보면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것에 대한 거부감이 문득 들기 마련이다.

2부에서는 맨움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페트로니우스를 중심으로 페호 태우기 행사를 벌이는가 하면 국회에 맨움 의원을 앉히는 등 맨움해방주의 운동을 벌인다. 그는 언론의 관심을 받는데, 이갈리아는 모든 것이 움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여서 온갖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본 이갈리아는 ‘말이 되지 않는’사회다. 그러나 이갈리아에서 본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페트로니우스가 맨움해방주의자로 활동하면서 쓴 <민주주의의 아들> 소설은 가부장제를 상상하며 쓰여졌다. 그의 소설을 읽은 이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참신하고 재밌다는 의견부터 혐오스럽고 가치 없다는 의견까지. 이 책을 읽은 우리 세계의 독자들 반응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여성들이 읽으면 통쾌하고 남성들이 읽으면 불쾌함을 느끼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분명히 느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현대사회는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되지만 여전히 우리의 의식 저편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익숙함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익숙함을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나를 더 잘 알기 위해 남을 배운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갈리아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