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프라이멀 피어』 리뷰

기자명 고두리 기자 (doori0914@skkuw.com)

누군가 말한다. 죄는 미워하더라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성찰한다면 우리는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을 때도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 몰라라 식의 발뺌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술에 취하거나 우울증, 다중인격 같은 정신이상 때문에 당시의 기억을 상실한 이들에게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고 스스로 몸을 행동하게끔 하는 ‘자유의지’가 발현되지 않았으므로 죄에 대한 책임은 없는 걸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아도 될까?

오늘날 현대사회는 이들에게 꽤나 관용을 베풀고 있는 듯하다. 작년 온 국민의 분노를 끓게 했던 ‘나영이 사건’의 범인 조두순만 해도 그렇다. 8세 여아를 잔혹하게 성폭행한 조두순은 무기징역에서 고작 12년 형을 받게 된다. 이유는 당시 그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의 감형으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성범죄 감형 원인에 음주가 제외됐다.

이 사건은 흡사 1996년 작 영화 『프라이멀 피어』와 같다. 어느 날 시카고에서 존경받는 로마 가톨릭 대주교 러쉬맨이 잔혹하게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유력한 용의자로 현장에서 붙잡힌 열아홉 살의 애런. 피범벅이 된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애런은 범인으로서 확실한 증거를 남기지만, 변호사 마티 베일은 사건 현장에 그가 아닌 제3자가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는 당시 기절을 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살인범행을 부인한다. 그가 정신이상이 있다고 판단한 베일은 애런에게 정신치료 상담을 받게 한다. 그 결과 애런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심리적으로 억압당해 일부 기억상실증이 있음이 나타났다. 즉,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 환자이며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교도소가 아니라 병원이다.

하지만 애런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확실한 살인 동기를 제공하는 테이프가 발견됨에 따라 사건은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애런을 괘씸하게 느낀 베일은 그를 찾아가 다그친다. 그러자 애런의 눈빛이 바뀌고, 말투가 싹 바뀐다. 평소 말을 버벅거리던 애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베일을 공격한다. 이를 토대로 애런은 다중성격 장애의 정신이상자로 판명됐다. 러쉬맨을 살인한 범인은 애런이 아니라 애런의 또 다른 모습인 로이였다. 자유의지가 온전하게 작동되지 않은 상태서, 즉 로이라는 다중인격의 모습에서 저질렀기에 애런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무형을 선고받게 된다.   

앞에서 얘기했던 조두순과 애런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잔혹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 정신이상 때문에 자유의지가 작동되지 않았다는 점, 그로 인해 범행의 책임이 완화됐다는 점.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은 둘 다 정신이상이 있을 때 형이 감면된다는 점을 알고 이를 악용한 것이다. 애런은 실제 다중인격자가 아니라 다중인격자를 완벽히 연기했다. 이처럼 자유의지 잣대만으로 범죄의 책임 유무를 따질 수 있을까?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