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은지 문화부장 (kafkaesk@skku.edu)

만화 <V for Vendetta>는 만화에 대한 편견을 속 시원하게 날려버릴 수작이다. 우리나라에서 만화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또 폭력과 선정성이 난무한다며 그 예술적 가치가 홀대받고 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 작품은 그 어떤 줄 글로도 쉬이 풀어내지 못할 무거운 주제를 한꺼번에 풀어내고 있으며, 이윽고 독자들이 흡수하게끔 돕는다. 이번 문화면의 ‘액자 속의 예술’ 코너에서는 속예술과 겉예술간의 연관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이유에서 영화 <V for Vendetta>를 소재로 기사를 작성했으나, 주인공 V와 그 사회에 대해 알 듯 말 듯, 혼자만의 즐거운 고민을 감내하고 싶다면 영화보다는 만화를 추천하는 바이다.

앞서 살펴봤던 미래의 영국 모습을 간단하게 거들떠볼까. 이 사회는 자유로운 비판과 의사 표현이 탄압되며, 침묵과 복종만이 강요된다. 전체를 위한 소수의 억압에 인간의 다양성은 철저히 짓밟힌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시민들은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지 살펴볼까. 그들은 놀랍게도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와 입을 막으며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V의 말마따나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일 게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다. 단지 남의 일처럼 느끼고 있을 뿐, 지금 우리 앞에 당면한 현실이다. 이 만화는 스토리를 쓴 앨런 무어의 회고에 따르면 1981년에 시작해 1988년에 잡지 연재를 마쳤다. 지어진 지 지금과 30년 정도의 차이가 있고, 게다가 무대는 한국과 동떨어진 영국이다. 영화에서는 다른 설정들에 의해 갈등의 양상이 다소 변화하긴 했으나 거칠게 요약하면 원작은 파시즘과 아나키즘의 대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10년의 우리나라는 자유와 평등이 헌법에 보장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허점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과거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고, V가 사는 사회를 은밀하게 잠식했던 파시즘은 현대 사회에서도 충분히, 아니 더욱 교묘하게 발생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상식으로 여겨지고, 효율성이 진리처럼 위시되는 이 사회에서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 치의 오류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때때로 어리석은 인간의 감정과는 달리 절대적일 것만 같은 합리와 이성에 대한 맹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당연히 요구해야 하는 권리를 애써 잊으려 하고, 이어서 스스로가 사회의 다양성을 해치는 주범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세시대도 아닌데 마녀사냥으로 서로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안심하려 든다.

지금까지도 형식적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일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사례를 열거하려면 숨도 쉬지 못할 정도다. 강제력을 동원해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또 어떤가. 근본적으로 문제를 살펴보면 교육의 획일화로 판에 박힌 사회 구성원을 양산해내는 것이 시작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한국에서 정부의 사회 정책은 사회 구성원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문제 삼기보다 서로 반목하는 경쟁 구도에 충실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과거와 비교할 때 현대판 파시즘의 본질은 ‘위장’에 있는 것 같다. 정체의 본질과 목적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런 길로 사람들을 흘러들게 만드는 것이 파시즘이다. 농담 식으로 말하면, 이들이 우리의 배후인건가?

같은 맥락에서 최근 해군 초계함(천안함) 침몰 사태와 관련해서 불안한 기운을 느낀다. 언론의 천안함 보도 행태를 보면 ‘아니면 말고’식의 미확인 보도 및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며,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시민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언론. 이에 천안함 실종자가족대표단은 ‘언론이 소설을 쓰고 있다’며 불만을 표출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이 하나의 이슈에 매몰돼 다른 이슈를 도외시하는 것도 문제이다. 물론 중차대한 문제이나 여기에 매몰돼 당장 다가온 선거 등 다른 사회 의제가 무시되는 것은 옳지 않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어떤 말을 믿어야 하고, 나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마주했다. 그러나 불안해만 하지 말자. V가 만화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무법과 함께 질서의 시대가 온다. 진실한 질서란 자발적인 질서를 뜻한다. 고요함이 절대적일수록 그 뇌성은 충격적으로 들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