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지난번 성대신문 1343호는 총학활동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를 실었다. 만족도가 인사캠은 23%, 자과캠은 34%에 그치고 있다. 모든 것을 수치로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낮은 만족도는 우리에게 학생회는 무엇인가 라는 진부한 질문을 다시 하게 한다. 총학생회와 대학원 총학생회 그리고 각 단과대 학생회 등으로 조직된 학생자치 활동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학우로부터 외면을 받는 껍데기 행위가 될 수 있다. 우리의 학생회 활동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독특한 의미를 부여 받아왔다. 자유로운 의견표현이 억제된 억압적 정치환경에서 대학은 진리의 탐구장이며 사상 및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야 한다는 상아탑의 이상에 기댄 작은 자유공간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은 항상 정치체제와 갈등을 하며 다른 한편 새로운 사회행위를 잉태하는 장(場)의 의미를 간직 해왔다. 그 연장선에서 총학생회는 이러한 행위를 만들어내고, 대변하는 중심에 서있다. 지난 20세기에 우리나라 대학의 총학생회 또는 대학간 연합체는 정치적인 격변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 역할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관련하여 매우 긍정적 이었으며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대학은 정치적인 “자유행위 공간”의 의미보다, 연구하고 탐구하는 “창조적 행위공간” 의 의미를 더욱 더 요구하고 있다. 글로벌화라는 새로운 파고는 대학에 새로운 사회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치역량의 신장을 목적으로 한 학생회는 새로운 시대적 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대학 학생회의 새로운 시대적 소임은 무엇일까?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창조역량의 신장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 대학의 학생회가 여전히 자치역량에 얽매인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수 밖에 없다. 이제 각 개인의 민주시민적인 자치역량은 사회교육에 일임해도 무방하다. 1970년대 초에 유럽의 대학은 극렬한 이데올로기적인 학생운동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였다. 유럽의 대학은 초토화된 연구환경을 회복시키기 위해 10여년간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80년대부터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대학을 만들어냈다. 이는 유럽의 대학들이 학생회 조직을 정치적인 행위 조직에서 대학의 연구 능력을 높이는 학술적 진흥조직으로 탈바꿈 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컨셉이 대학 구성원간에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대학 학생들의 총학생회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것을 우리는 이제 자세히 음미해 보아야 한다. 대학의 기능이 바뀌고 있으며, 이에따라 구성원들의 요구가 차원을 달리한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두 캠퍼스로 나뉘어진 우리 대학은 옛날처럼 동일한 행위, 동일한 공간에서 같아짐과 같은 목적에 더 이상 매달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양 캠퍼스간에 경쟁을 해야 한다. 학생회는 이러한 점에 이제 유념해야 한다. 총학생회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기존의 컨셉을 바꾸지 않는 한, 총학생회에 대한 만족도는 낮아 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