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돌아오는 달

윤소정(건축 16)

 

산책

퇴근 시간이 1시간 하고도 40분이 지난 시각 K는 휴대전화 속 달의 위상어플을 켰다. 오늘은 78.6%로 차오르는 달. 이 정도면 막 안전하지도 또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은 수치지, 혼자 생각하던 K는 이미 꺼진 듀얼 모니터의 틈으로 박사과정 연구원을 흘끗 염탐했다. 몇 시간 내로 끝내기는 글러 보이는 그의 화면 속 허전한 도면을 보곤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K는 책상 위 널브러진 종이들을 가지런히 하곤 주섬주섬 카드지갑과 무선 이어폰, 텀블러를 에코백에 집어넣고 손잡이를 여며 어깨에 둘러맨 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저 선배,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는 시선을 모니터에, 양손을 키보드에 고정한 채로 고개만 까딱했다. K는 이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울리는 타자 소리, 마우스의 클릭음에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연구실이 있는 서울 소재 한 대학의 원룸촌 변두리에 K의 방이 있다. 이 대학 주변의 원룸촌들은 여느 대학과 비슷하게 정문, 후문, 북문, 쪽문 이렇게 각 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문으로 불리곤 한다. 별다른 연고가 없는 이곳의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어 방을 구하러 발품을 팔았던 원룸촌 중 가장 술집이며 편의시설 수가 적고 지하철역과도 먼 정문 쪽의 원룸을 고른 이유는 단지 방세가 싸고 조용해서였다. 그러나 K는 그런 원룸의 위치에 불만을 느낀 적 없었고, 그건 Y와 저수지 때문이었다.


오늘도 저 건너편은 참 아름답군. 옅게 부는 바람 덕에 잔잔하게 이는 물결, 저수지를 거울삼아 반짝거리는 아파트 불빛, 가로등 불빛과 뾰족뾰족한 메타세쿼이어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K는 생각했다. K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늘 연구실 퇴근 이후 잠시 방에 들러 짐을 대충 내려놓고 슬랙스를 운동복으로, 블라우스를 아노락 점퍼로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구두를 신기 위해 착용했던 페이크 삭스까지 벗어 세탁기에 넣곤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저수지로 향했다.


철 따라 바뀌는 저수지의 풍경에 감탄하다 보면 산책로의 서쪽 변에 다다른다. 다리가 살짝 뻐근해질 만큼 걷거나 뛰다 보면, ‘자 모양으로 꽤 길게 돌출된 수변 데크가 나온다. 저수지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동네에서 오래 산 주민들이기 때문에 굳이 데크 쪽으로 길을 틀지 않고 지름길인 흙바닥을 택해 지나가곤 하지만, K는 언제나 이 갈림길에 다다를 때면 조금의 고민도 없이 데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얼굴로 부는 바람을 맞으며 물 위를 걷는 기분을 만끽하곤 했다.


그러나 석 달 전, 그러니까 K와 같은 대학원에 다녔던 Y가 메이저 건설사에 합격해 연구실을 그만둔 시점부터 K의 산책에는 조금의 비밀이 생겼다. 수변 데크의 중앙, 전망을 위해 넓게 조성된 부분에 올라설 때마다 K에게만 보이고 들리고 심지어 만져지는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몇 번의 마주침 이후, K는 스스로 그것을 달 도깨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Y

KY는 비슷한 위치에 자취방이 있다는 이유로 짤막한 퇴근길을 함께하며 가까워진 사이였다. 이 근방 K의 행동반경 내에 있는 공간들의 첫 기억은 전부 Y와 함께였다. 새롭게 이사 온 동네에 아는 것이 없었던 K는 자대 대학원에 진학해 이 대학 주변 맛집이며 쾌적한 카페, 산책하기 좋은 곳들을 잘 아는 Y에게 꽤나 의지했다.


-무슨 튜브도 아니고, 서른이 되어 가니 이 술 배는 실시간으로 붙는 것 같아요.


K는 왠지 Y에게는 조금 궁상맞은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 의미 없이 뱉은 푸념에도 Y는 적절한 해결책, 응원을 자기가 아는 공간으로 치환해 답하곤 했다.


-좀 걷다 갈까요? 십분 정도만 가면 산책하기 좋은 곳 있는데.


Y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방의 한 소도시에는 유명한 석호가 있고, 그곳에는 근처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 본 오래된 설화가 있다. 그도 그럴 게 그 호수는 봄소풍이나 가을 사생대회 등 학교의 소소한
행사들에 어린이들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지역의 몇 안 되는 명소였으며, 그곳에 아이들을 데려간 선생님이 흥밋거리로 들려주던 레퍼토리는 항상 비슷비슷했기 때문이다.


연구실 회식 후 얼큰히 취해 부른 배를 꺼뜨리려 학교 주변 저수지를 산책하던 어느 밤, Y는 그 설화를 K에게 들려주었다. 설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그 호수 중앙에 섬처럼 떠 있는 정자에는 달이 다섯 개 뜬다는 것이었다. 하늘에 뜬 달, 호수와 호수에 맞닿은 바다에 비친 달, 술잔에 뜬 달, 그리고 임의 눈동자에 어린 달.


다소 낭만적인 듯한 이 이야기를 Y는 술에 취해서였는지 꽤나 덤덤하게 풀어놓았다. Y는 이미 고향 친구들은 다 잊어버린 것 같은 그 이야기를 자신은 여전히 기억한다며, 이 저수지에 오면 그 고향의 석호가 떠오르곤 한다는 것이었다. K는 중세의 석호 한가운데에 떠 있는 정자와 귀퉁이에 묶여 있는 초승달 같은 쪽배, 그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신선놀음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비추는 커다란 보름달을 상상하며 말없이 걸었다.


-근데, 그게 사실 좀 말은 안 돼요.


Y가 불쑥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호수, 또래들 사이에서 누가 빠져서 종종 죽는다고 소문난 곳이었거든요. 근데 더 불쾌한 건 사인이 익사가 아니라 중독사였다는 거예요. 호수 물이 얼마나 더러운지. 옛날에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바다랑도 거리가 좀 있어서 한 번에 다섯 개의 달을 본다? 그건 요즘은 불가능하죠.


-그런가요.


K는 갑자기 냉소 조로 변한 Y에 서운함을 느꼈고,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의 의미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Y는 종종 대화하던 도중 자신도 모르는 새 비관주의자가 되는데, 그럴 때마다 Y는 호수, 설화 따위가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아름다움을 느꼈던 자기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K는 그런 Y를 볼 때 불안감을 느꼈고 그런 본능적인 불안이 대개 그렇듯 곧 구체화되어 현실로 다가왔다.


 

보름달

그러나 이곳 서울의 저수지엔 달이 두 개만 뜬다. K의 주변에는 그 석호와 바다도 없고, 설화 속 낭만적인 주인공들처럼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노닥거릴 애인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Y가 떠난 이후 이 기묘한 저수지만이 K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이름과 같이 하나의 달 만을 비춰주는 이 저수지의 주위를 KY가 떠난 이후 마치 원한이 서린 지박령처럼 수백 바퀴는 돌았다.


K가 기억하는 한 그것을 처음 만난 날은 Y의 송별회가 있던 밤이었다.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동료들을 역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길, 항상 Y와 함께했던 길을 혼자 걷자니 허전했다. 그날따라 달은 밝았고, 자취방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 공동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K의 눈에 Y가 살던 빌라가 들어왔다. Y의 자취방은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아 비어 있었다. 창문 너머를 보니 역시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K는 전세계약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훌쩍 떠나버린 Y를 생각했다. 잠시 Y가 살던 방의 창문을 바라보던 K는 현관 옆의 터치패드를 향하던 손을 거두고 Y가 살던 빌라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세 발짝쯤 걸었을까. Y의 창문에 잠깐 보름달이 비쳤다가 한 발짝 더 내딛자 창문 한쪽으로 사라졌다. K는 한 발짝 다시 뒤로, 다시 앞으로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하며 달이 Y의 창문에 비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걷다 들어가야겠어. K는 그대로 빌라를 지나쳐 저수지로 향했다.


K는 갑자기 떠난 Y에게 서운하면서도 그가 알려준 저수지로 향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타인이 알려준 것이 놀랄 만큼 자신의 취향일 때, K는 그 황홀함에 취하면서도 동시에 왠지 상대는 이기고, 자신은 지는 기분이 들었다. 취향에 이기고 지는 건 없고, 사실 다 쓸데없는 감정임을 알았음에도 괜히 그랬다. 찌질한 사고방식이야, 스스로 조소하면서도 말이다. 어린 시절 친구와 음악을 공유하며 느꼈던 그런 열등감이 이제는 없는 Y를 향하고 있었다.


그날도 K는 데크와 흙바닥의 갈림길에 섰다. 자정이 10분 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산마루에 뜬 밝은 달이 K를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 늦긴 늦었나. 사람 코빼기도 안 보이네. K는 산책로에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K는 이 근방 치안을 신뢰하는 편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새벽에 완전히 마음 놓고 물가를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데크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생각하던 K는 왜가리 한 마리가 멀리 난간 위에 앉아 있는 걸 보고 안녕, 손 인사하며 데크 중심부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리 두 마리도 전망대에 다리를 숨긴 자세로 편하게 쉬고 있었다. 이 시간대에는 너희가 이곳의 주인이구나. 피식 웃던 K는 습관처럼 건너편을 바라봤다.


산책로 위로는 노란빛의 가로등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아래로는 그 불빛이 그대로 반사되었다. 물결과 함께 반짝거리는 그곳의 풍경은 감탄스럽게 아름다웠다. K는 사실 이토록 아름답고 마음이 편해지는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저수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요하게 걷는 동안에도 눈과 코, 귀는 시시각각 다른 자극들에 반응하느라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매일 조금씩 다른 하늘빛과 구름, 공기 냄새, 나뭇잎의 빛깔에 집중하고 철 따라 피고 지는 이름 모를 꽃들과 날아다니는 새, 벌레, 오고 가는 자전거와 달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와 있곤 했다.


K는 이윽고 전망대 난간에 기댔다. 그러다 서서히 이곳을 처음 알려 준 Y에게로 신경이 옮아갔다. 이제 좀 걸어야지, 하고 고개를 돌리던 K의 시선이 저수지 중간의 수풀에 고정되었다. 노랗고 밝은 안개 덩어리 같은 무언가가 수풀 사이에 어른거렸다. 그 덩어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K는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홀린 듯 난간을 손으로 꽉 잡고 몸을 저수지 쪽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오른편 난간에 앉아 있던 왜가리가 갑자기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미간을 찌푸리고 가늘게 뜬 눈으로 수풀 사이를 바라보던 K는 순간 화들짝 놀라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저수지의 달

K는 다음날 새벽, 전망대의 나무 바닥에서 눈을 떴다. 직전의 상황을 떠올려보니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K의 몸은 저수지 쪽으로 기울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 방향인 전망대의 바닥에 누워 있었고, 팔에 힘을 잃어 저수지 수면 쪽으로 얼굴부터 떨어지던 찰나, K가 느꼈던 것은 저수지 수면의 차가움이 아닌, 눈부심과 따뜻함이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 앉아 구석구석을 확인하니 옷은 새벽의 습기에 살짝 눅눅했으나 젖었던 흔적이라고는 볼 수 없었으며, 팔다리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모기 물린 자국이 두어 군데 있는 것 말고는 말이다.


K의 기억은 또렷했다. K는 추락하던 바로 그 시점에 자신을 구해 준 그것의 존재를 인지했다. 분명 자신을 난간 바깥으로 몸을 내밀게 한 그 안개 덩어리였다. 그 안개 덩어리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K는 그것이 자신에게 소리와 빛으로 말을 건넸음을 기억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 뜻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는 미지수였다. 설마 죽으려고 그랬어? 분명 이렇게 말을 걸었다. 그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바닥에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수풀 쪽을 바라보니 어젯밤보다는 옅어졌지만 바로 그 위치에 안개 덩어리는 여전히 있었다. K는 이목구비도 없는 그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과 오해를 산 데에 대한 억울함이 앞섰다.
 

-죽기는 누가 죽어. 놀라서 그랬다!


수풀 사이를 향해 작게 소리치던 K는 저 멀리서 인기척을 느꼈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한 노부부가 새벽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K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K는 우선 누워 있던 자리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가방을 열어 휴대전화를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가 지나 있었다.


-, 나 노숙한 거야?


K는 잠시 헛웃음을 짓다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처럼 말을 걸지도 몰라. 그러나 안개 덩어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흐릿해질 뿐이었다. 당황하던 K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얼른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켜고 수풀을 향해 최대한 줌을 당겨 사진을 찍었다. 돌아오는 길에 반대편 산책로에서 바라본 수풀엔 거의 사라진 안개 덩어리가 있었고, 어느덧 어슴푸레 밝아진 하늘에 아직 지지 않고 낮게 떠 있는 보름달이 보일 뿐이었다.

 


도시의 달

K가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 연구실은 주로 공공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고 연구비를 충당했다. 말이 좋아 협업이지 공무원들이 직접 하기 까다로운 일들의 하청으로, 욕 받이 인력 정도인 셈이었다. KY는 지난여름 한 달간 서울의 낙후된 주거지역들을 다니며 그 지역 주민들을 만나 주거환경에 대한 만족도나 불만사항을 조사했다.


주민들과 대면하는 일은 K의 예상보다 고되었다. 대부분의 구역은 지하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열 정거장 가까이 가, 또다시 뙤약볕 아래를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평지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개 구역의 초입에 들어가면 끝도 없이 올라가는 건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단층 혹은 2층짜리 건물들이 다닥다닥 골목 좌우로 붙어있었다. 대체로 썰렁한 분위기였고,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행인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개미 한 마리 없이 조용한 구역도 있었다.


-이래서 선배들이 우리를 보냈나 봐요.


두 사람이 친하니까 같이 다녀오면 되겠다며 슬쩍 둘을 등 떠밀던 연구실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Y의 한숨 섞인 깨달음에 그제야 K도 그 내막을 알아차렸다. 갑갑한 연구실을 떠나 외근할 생각에 들떴던 지난밤이 한심했다.


그곳에는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희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고 이러이러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저리 가라고 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저희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여기 당신들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오는지 알아? 나는 이제 다 싫어. 지겹다고. .


K는 갑자기 공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진심으로 궁금했다. 뭐가 이 사람을 이토록 화나게 했을까.


-어르신, 저희는 그냥 마을에 뭐 필요한 거 있으신 지 아닌지 그런 거 여쭙는 중이에요.


노인은 그냥 가라는 말을 반복하며 들고 있던 분리수거 봉투를 신경질적으로 비우곤 반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KY는 첫 시도에 마주한 난관에 어안이 벙벙했다.


-잠깐 앉을까요?


Y가 제안했고, K는 이에 응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하며 벤치에 말없이 앉았다. 나무 몇 그루와 녹슨 운동기구, 벤치 두 개가 다인 작은 공원이었다. 공원 가장자리 경계석에 한 노인이 땀을 흘리며 앉아있었다. K는 손에 든 조사지를 들여다보았다. 상단에 굵은 글씨로 재개발 예정지구 주민 의향조사라고 적혀 있다.


-아직 유월인데 이렇게나 더울 일인가요.


-다들 저런 식이면 앞으로 어떡해야 하죠?


-그러게요. 어째 분위기가 별로죠?


두 사람은 잠시 앉아 숨을 돌린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주민들에게 몇 차례 말을 걸었지만 모두 바쁘다는 말, 관심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 연이은 거절에 한숨만 쉬며 걷던 중, 골목 어귀에 비교적 최근 지은 것 같은 다세대주택 몇 채가 보였다. 한 중년 여자가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둘은 그 건물들이 해당 구역인지 아닌지를 지도와 비교하며 확인하다, 맞다는 것을 확인하곤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희 잠시 주민 의견 조사 나왔는데요.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 괜찮아요. 어떤 조사인가요?


여자는 Y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예상과 다른 다정한 말투에 K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자는 다세대주택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여자에게 설문을 받은 다음, 긴장이 풀린 두 사람은 여자와 잠시 대화했다.


-다른 주민분들은 바쁘신 지 응답을 잘 안 해주시더라고요.


K의 말에 대한 여자의 대답은 두 사람에게는 뜻 밖이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그 허름해 보이는 건물들의 쪽방에 세를 놓고 그 세로 온 식구가 먹고 산다며, 아마 대부분이 재개발 같은 건 원치 않을 것이라는 거였다. 몇 번 주민설명회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배당금이니 추가금이니 하는 것들 탓에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어 결국 모두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삶의 질, 주거환경, 쾌적성 같은 가치는 그들에겐 배부른 소리로 들릴 거란 것이다.


이어지는 조사에서 두 사람은 비슷한 거절과 외면, 분노와 환대를 번갈아 받았다. 그들은 처음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좋은 의도라고 주민들에게 설명하면서도 정말 그런 게 맞는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다. 더욱 착잡했던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근데 우리가 정말 좋은 의도인 게 맞을까요?


어느 날 K가 말했다. 저녁 늦게 설문 부수를 채워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구역의 가장 윗부분에서 터벅터벅 마을버스를 타러 내려오던 길이었다. 그동안 그들이 애써 외면하던 말이었다. Y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하다 고개를 돌렸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하늘은 잘 보이네요.


-야경도요. 낮엔 그렇게 덥더니 이제 바람이 좀 부네요.


K는 그런 Y의 반응이 이해가 갔기 때문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날 이후 이어지는 조사에서 Y는 어딘가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모든 불평과 꾸짖음을 기록하려 했다. KY는 자연스럽게 그 기간 동안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방보다 주민들과 대화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되었는데, K는 그 어느 때보다 그때 Y의 진심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K는 사람의 진심을 아는 데에는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믿어왔다. 너무 쉽게 뱉어지는 말보단 행동으로, 글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투영되는 진심을 더욱 갚지게 여겼다. 조사에 응하지도 않은 노인들의 말을 빼곡히 받아 적은 설문용지 뒷면의 Y의 글씨에서 Y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삭망

-야 이 수업 조교 Y선배 아니었어?


-그 선배 건설사 갔을 걸? 요즘 새벽마다 현장 간다더라.

 

Y는 이제 기존 주택들을 전면 철거한 뒤 새로 짓는 아파트 현장으로 출퇴근한다. 강제 철거로 아직까지 시위나 소송으로 시끄러운 구역이었다. 동료 연구원들의 잡담 속에서, Y가 담당하던 수업의 학생들 사이의 대화에서 알음알음 들은 근황이다. 신입사원에게 현장을 고를 권리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K는 그곳이 여름의 달동네에서 마주한 Y의 표정과 적어 내린 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K는 한 달 넘게 안개 덩어리의 정체를 밝혀내려 마치 탐정처럼 몰두했다. K가 관찰한 결과는 이랬다. 그것은 주기성을 띤다. 안개 덩어리는 처음 목격한 날 이후 점점 흐려졌다가 다시 짙어졌다. 그러다 꼬박 2주가 지난 뒤, 다시 그때와 비슷할 정도로 뚜렷해졌지만, 또다시 흐려졌다.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퇴근 직후의 시간이라 산책 나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 사실 말을 한다고 통할 것이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처음 마주한 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찍은 사진에는 K가 본 것이 마치 헛것인 양 안개 덩어리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새벽 저수지의 풍경이었다. K는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거 안 보여요? 모두 너무도 평온하게 저수지를 돌고 있었다.


한 달 하고도 2주가 지난 뒤, K는 결심했다. 오늘은 꼭 담판을 짓고 말리라. K가 관측한 그 주기성에 따라 추적했을 때 오늘 안개 덩어리는 가장 밝아진다. K는 처음 그날과 같은 상황을 만들고자 자정이 되기 조금 전, 맥주를 한 캔 비운 다음 저수지로 향했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걷다 데크에 다다랐을 때 예상대로 밝은 안개 덩어리가 보였다. 평일 한밤중이라 오는 내내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K는 수풀과 가장 가까운 쪽으로 걸어가 좌우를 살핀 뒤, 덩어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안녕. 내 말 들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번처럼 말 좀 해봐.


-안녕!


내가 이 달밤에 뭐 하고 있는 거지. 답답해진 K는 저번처럼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반응을 해 주는 건가 싶었지만 다시 난간에 매달릴 마음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저기 내 말 안 들려?


-한국어가 안 되나? Hey!


헛것이라기엔 너무도 선명했다. 술기운이라기엔 그동안 봐온 게 너무 숱했다. 몇 차례 말을 걸던 K의 눈에 데크 한편에 메인 고무보트가 들어왔다. 시청 공원녹지과 마크가 새겨진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가끔 보트에 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안개 덩어리와 보트를 번갈아 보던 안개 덩어리 쪽을 살짝 흘겨본 뒤 보트가 묶인 곳으로 걸어갔다. 보안은 생각보다 허술했다. 앉는 부분은 천막 같은 걸로 덮여 있었고, 데크 끝자락에 박혀 있는 두 개의 말뚝에 밧줄로 몇 차례 감아 둔 게 다였다.
 

이거 걸리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생각했지만 술을 마셔서 인지 대담해진 K는 쪼그리고 앉아 손을 뻗어 천막을 들어 올렸다. 천막을 걷자 보트 한편에 달린 모터가 보였다. K는 보트 안으로 들어가 시동을 걸어 보려 노력했다.


-TV 보니까 이 줄을 당기면 잘만 되던데 왜 안되니?


K는 모터에 달린 버튼을 달깍거리고 벨트 같은 것도 힘껏 당겨 보았지만 시동을 거는 데는 실패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이든 도움이 될 것을 찾아보려 보트를 뒤졌다. 바깥쪽에 두 개의 플라스틱 노가 달려 있었다. 고생길이 불 보듯 뻔했지만, K는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으로 노를 빼내어 보트 안으로 올리고, 데크 쪽으로 가 보트를 고정하는 밧줄의 끝을 풀어 감긴 방향의 반대로 돌려 말뚝에서 보트를 분리시켰다.


데크에 노를 대고 쭉 밀어 보트의 방향을 수풀 쪽으로 돌리고, K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안개 덩어리의 빛이 눈에 띄게 일렁이고 있었다. K는 안개 덩어리가 자신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노를 힘차게 저어 수풀로 나아갔다. 다행히도 수풀 방향으로 미약하지만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고무보트는 더디게 나아갔다. K는 안개 덩어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끊임없이 노를 저었다.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수풀 바로 앞, 보트 가장자리에서 팔을 뻗으면 안개 덩어리에 닿을 법한 위치에 다다랐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눈부실 만큼 밝았다. K는 이목구비도 없는 이 안개 덩어리가 당황했다는 것을 빛으로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안녕?


K는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여기서 빠지기라도 하면 다시 말 걸어 줄래? 나 되게 힘들게 왔어. 봤지?


안개 덩어리는 창백한 빛을 뗬다. K는 장난스럽게 팔을 보여주며 말했다. 수풀로 오는 데에 도움이 됐던 바람이 점점 세게 불고 있었다. K가 탄 보트가 노를 젓지 않아도 자꾸 수풀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이대로 바람이 더 세게 분다면 데크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위험해. 돌아가. 안개 덩어리가 그때처럼 말이 아닌 말로 말을 건넸다.


-이제야 말 걸어주네. 나 초등학교 때 해양소년단이었어. 노 잘 저어. 수영도 잘해.


K는 뻔뻔한 얼굴을 하곤 수풀 사이 끼워 준 노를 당겨 안개 덩어리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어이없다는 빛을 띠는 안개 덩어리에게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퍼부었다.


-너 정체가 뭐야? 말은 어떻게 하는 거야? 왜 나한테만 보여? 뭐 도깨비불 이런 거야?


K는 숨죽여 대답을 기다렸다. 안개 덩어리는 난처한 빛을 뗬지만, 왠지 대답해 줄 것 같았다.


난 달이야.


-뭐 달? 하늘에 저 달?


K는 하늘을 바라봤다. 보름이었다. 자정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는 달이 보였다.


-그럼 하늘에 저건 뭔데?


달은 하나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달은 하나야


몇 번의 실랑이 끝에 K는 안개 덩어리와의 일방적 합의를 도출해 냈다. 세상에는 많은 달들의 상이 존재하고, 안개 덩어리는 말해주지 않는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고등학교 때 지구과학을 가장 좋아하던 이과생 K는 원본도 아닌 상을 달로 불러 주기 싫다며, 스스로 안개 덩어리를 달 도깨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식으로 한 첫 대화는 다정하진 않았지만 K는 도깨비가 마음에 들었다.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는 존재지만 왠지 무기력한 게 무해해 보여 좋았다. 문제는 도깨비에게 있지 않았다. K는 도깨비의 빛이 가장 세지는 보름과 보름 전후 며칠, 이 때와 같은 상황을 만든답시고 술을 마시고 새벽까지 밖에서 노를 젓다 보니 컨디셔 난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시점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K가 친하게 지내던 Y의 부재에 상심이 큰 모양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말이다. 어쨌건 K는 퇴근 후 달 도깨비와 대화를 할 수 있든 없든, 저수지로 향했다.


 

회피

퇴근을 앞두고 달의 위상 어플을 체크하려고 휴대전화 화면을 보던 K는 한 시간쯤 전에 도착한 한 통의 메시지에 잠시 멈칫했다. 연구실을 떠난 후 Y로부터 온 첫 번째 연락이었다.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야 잘 지내냐니. 건설사로 향한 Y의 갑작스러운 선택이 이해되지 않았던 만큼 야속했던 건 다른 연구원들, 조교로 들어간 수업의 학생들을 우회해 전해지는 Y의 소식들과 그럼에도 K에게는 닿지 않는 연락이었다. . 하고 답장을 보내려던 K는 그냥 화면을 꺼 버렸다.


-너는 진짜 도깨비도 아닌데 내기 거는 거 되게 좋아하더라.


도깨비의 빛이 세지는 날, K와 도깨비는 종종 내기를 했다. 도깨비는 보름 전후 이틀 정도는 말할 수는 있지만 수풀 사이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K는 그날그날 달의 위상을 알려주는 어플을 깔았고, 보름을 기다리면서도 보름이 다가오면 다음 날의 컨디션을 걱정하곤 했다. 그러나 Y가 떠난 뒤 이처럼 즐거운 나날들은 없었다. K는 공허함을 회피하듯 도깨비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 그 이후에는 도깨비를 만나 시간을 보내는 데 몰두했다.


내기를 시작했던 것도 K였다. K는 꼬박꼬박 도깨비를 만나러 가긴 했지만 사실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무료한 나머지 K는 책을 챙겨 보트를 타고 나가 그 빛을 조명 삼아 책을 읽곤 했다.


나를 무드등처럼 쓰지 마. 불만이 가득한 빛으로 도깨비가 말했다. 조금 미안해진 K는 함께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하다 도깨비들이 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진짜 도깨비는 아니지만 뭐 어떤가, 싶어 제안했더니 생각보다 즐거운 빛을 뗬다.


내기의 종목은 주로 신체활동이었다. 도깨비는 몸의 모양을 조절할 수는 있었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신체랄 것도 없이 뿌연 덩어리처럼 존재하긴 했지만. K와 도깨비는 보트를 한편에 메어 두고 누가 먼저 저기 플라타너스 나무까지 도착하는지, 앞구르기 많이 하기 따위를 두고 내기를 했다. 어떤 때는 누가 먼저 왜가리를 발견하는지, 누가 먼저 제비꽃을 찾는지, 누가 고른 청둥오리가 더 오래 잠수하는지 같은 시시껄렁한 내기도 했다.


어느 보름의 새벽, 먼저 길고양이를 발견하는 것을 두고 내기를 걸고 저수지를 돌아다니다 나무다리 아래서 삼색 고양이를 먼저 발견한 K는 데크 위 벤치에 누워 도깨비가 부쳐 주는 부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부채 바람 말고도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이 가고 있었다. 이런 시원한 바람들은 낮 동안엔 어디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불어올까.


-그럼 너는 바다랑 눈동자, 술잔 중 어느 거지?


나른해진 KY가 말해 준 석호의 설화를 도깨비에게 말해주었다.


-여기 뜨는 건 하늘의 달, 저수지의 달 이렇게 두 개니까 너는 나머지 셋 중의 하나 아니야? 가만, 이제 그곳에도 다섯 개의 달은 뜨지 않는다던데. 너는 그 동네 달들이랑은 연락 안 하고 사니?


K가 진지하게 묻자 도깨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과생이라고 재더니, 그 설화에는 왜 그렇게 몰입하는데? 그렇게 수가 딱딱 맞는 게 아니야 이 자연은.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궁금하면 한번 가보는 게 어때? 툴툴거리던 도깨비는 점차 진지한 빛을 띠며 말했다.


 

G시로의 여행

여행은 오랜만이었다. 갑작스러운 휴가 요청에 놀란 빛도 잠시, 박사과정은 조금 안쓰러운 표정으로 하긴 K 씨 요즘 얼굴이 좀 까칠해졌다며, 자기가 교수에게 잘 말해 둘 테니 푹 쉬고 오라고 말했다. G시에서 서울로 통하는 KTX 기차 편이 최근 생겨 여행길은 조금도 고되지 않았다. 기차 창가의 풍경을 두 시간쯤 바라본 뒤 G역에 도착한 K는 교통편을 검색하다 석호로 향하는 버스가 딱 두 대 있는데, 기다리기엔 배차간격이 너무 넓다는 것을 깨닫곤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는 석호로 가 달라는 K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혼자 여행하러 온 거냐고, 어디 어디를 갈 계획인지 묻던 기사는 석호 외에 별다른 계획 없이 온 K를 신기하게 쳐다보다 가볼 만한 곳 두어 군데를 추천해 줬다.


-저 기사님, 그냥 아까 말씀해주신 거리로 가 주시겠어요?


석호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이자 K는 왠지 석호에 도착하는 시간을 미루고 싶었다. Y가 말한 그 유독한 강물이 흐르는 낭만이 죽어버린 호수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어차피 달이 뜨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그래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여행 가면 꼭 들리더라고. 유명한 카페도 몇 군데 있고, 오래된 유적지도 있어서 볼만 할 거예요. 호수에서도 가까워서 넉넉히 한 삼십 분만 걸으면 될 걸?


기사는 잘 생각했다는 듯 빙긋 웃으며 깜빡이를 켰다. 기사의 추천대로 그 거리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었다. 오래된 담장 너머로 넝쿨진 능소화가 잔뜩 펴 있는 파란 대문 집이 그 거리의 첫인상이었다. 원래 있던 고택을 단장해 오픈한 카페며 상점들이 골목 곳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었다.


거리를 둘러보던 K는 마음에 드는 한적한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다락에 올라앉았다. 사는 곳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 것 같았다. 다락 한편에 G시에 관한 책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제야 여행 중임이 실감 났다.


석호를 배경으로 한 지역 월간지가 눈에 띄어 빼어 읽어보려던 중, 주문을 받았던 사장이 쟁반에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커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웃으며 커피를 건네준 뒤 돌아가려던 사장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혹시 호수 가 보시려는 거면 조금 서둘러 가보세요. 노을이 아주 예쁘답니다.


놀란 K에게 사장은 싱긋 웃으며 책 표지가 보이길래, 하고 덧붙였다. 커피는 아주 맛있었다. 조금 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달이 뜨고 나서 갈 계획이던 K는 고민하다 커피를 조금 빨리 들이켜곤 짐을 챙겨 일어났다.


지도 어플로 검색해 보니 호수까지는 약 20, 설화 속의 정자가 있는 쪽까지는 약 30분이 걸리는 위치였다. 매일 저수지를 몇 바퀴 씩 돌던 K는 그 정도는 뭐, 하며 가볍게 길을 나섰다. 카페가 있는 거리의 끝자락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니 풀숲이 우거진 곳인 나왔다. 수풀이 우거지고 포장되지 않은 길을 따라 몇 분 걷자 탁 트인 산책로가 나왔고, 멀리서 석호가 보였다. 조금 서둘러 걸었더니 석양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석호

석호는 Y의 기억과는 딴판이었다. 호수 물은 마냥 투명하지는 않았지만 관리되지 않은 물에서 나곤 하는 악취가 전혀 나지 않았고, 수질전문가가 아닌 K의 눈에도 깨끗하다는 게 느껴졌다. 석호는 저수지보다 세 배 정도 넓은 면적이었고, 한 바퀴가 그대로 이어져 있는 저수지의 산책로와 달리 곳곳에 습지 조성 구역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샛길이 있었다. K는 저수지에서도 데크로 향하던 습성을 버리지 못해 모든 샛길에 가 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샛길에는 특색이 되는 식물 종이 있는 모양이었다. 첫 번째 샛길에 놓인 팻말에는 수국, 튤립 정원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늦여름이라 두 종류의 꽃 모두 피어 있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착한 두 번째 샛길은 멀리서부터 은은한 향이 나더니 아니나 다를까 연잎이 줄지어 있는 습지를 끼고 있었다. 역시 연꽃이 만개할 시기가 지나 몇 송이의 연꽃만이 피어 있었지만, 실물로는 드물게 본 연꽃이라 괜히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세 번째 샛길에는 살면서 처음 보는 종류의 식물이 있었다. 그 식물 군락지 앞의 넓은 데크 공간에는 이제껏 석호에서 본 가장 많은 사람들이 습지를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심지어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도 몇 대 있었다. K는 저게 뭔데 저러지, 하는 마음에 크게 세워져 있는 안내판 앞으로 다가가 적혀 있는 것들을 읽었다. 해당 식물은 가시연꽃으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몇 해 전 석호의 습지를 복원하고 수질개선을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했는데, 그 이후 이곳 석호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멸종된 것으로 보았던 가시연꽃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해 크게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작은 감동을 느끼며 바라본 가시연꽃은 앞선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았을 때보다 훨씬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샛길을 전부 돌며 여유롭게 돌아보던 K가 드디어 설화 속의 정자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 해는 다 지고 밝은 달이 낮게 떠 있었다. Y의 말 중 유일하게 맞는 부분이 있었다. 바다와 석호 사이에는 모래사장, 솔밭, 호텔과 술집들이 들어선 상가, 4차선 도로, 석호 주변의 산책로가 차례로 있어 호텔 테라스에 있지 않고서야 바다에 뜬 달과 석호에 뜬 달을 동시에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K는 바다와 석호 사이를 훼방 놓으려는 듯 높게 뻗은 호텔 위에서만 두 공간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K는 밤의 석호를 좀 더 걸었다. 예약해 둔 숙소에 가려던 K는 자기도 모르는 세 좀 전에 들렀던 카페가 있는 거리로 돌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 도착한 거리에는 곳곳에 문을 닫고 있는 가게들이 보였다. 카페 앞에 도착한 K는 아직 켜져 있는 불에 안도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머, 또 오셨네요?

카페 사장은 반가운 듯 맞아줬다. 카페가 문을 닫으려면 아직 몇 시간 남았다고도 했다. K는 사장이 추천하는 음료를 시키고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석호에 관한 책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호수가 마음에 드셨나 봐요.


음료를 가져다주던 사장은 K에게 말을 걸었다. KY에게 들은 이야기를 사장에게 물어보았다. 석호가 더러워진 과정, 다시 깨끗해진 과정이 궁금했다. G시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사장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 Y의 말대로 10년쯤 전에는 석호의 수질이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고 한다. 원래의 석호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퇴적물이 차차 쌓이며 아예 바다에서 고립된 와중에 농경지 확보를 위한 간척사업, 사람들이 방류한 오염물질들이 그대로 안에 쌓이며 물이 썩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너무 깨끗하던데, 어떻게 이렇게 깨끗해진 거죠?


너무 심각한 수질 오염에 당시 재생사업에 임하던 전문가들끼리도 의견이 갈렸다고 한다. 답은 해수 도입이었다. 초반에는 해수의 역 오염이며 담수에 사는 생물들이 해수의 염분 때문에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G시 소재 대학의 한 교수가 해수 도입을 반대하는 시청 관계자들을 모아 두고 그 안정성과 효과를 수식으로 증명했다고 한다. 그 결과 석호는 다시 깨끗해졌고, 다시 아름다워졌다. 인간에 의해 썩어 간 생태계가 다시 인간에 의해 돌아오다니, K는 석호가 참 여러모로 드라마틱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숙소로 향하는 길, K는 문득 석호에서 본 가시연꽃이 생각났다. 해수로 인한 오염 개선을 증명한 교수는 가시연꽃이 다시 피어날 것이라고도 수식으로 증명할 수 있었을까?


그 순간 KY에게 연락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지체할 것 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순환

K는 도깨비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G시로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K는 바로 저수지로 향했다. 어플로 체크한 달의 위상은 도깨비와 멀리서 대화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울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트를 타고 나가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데크에 도착했을 때, K는 쇠사슬로 단단하게 둘러싸여 있는 보트를 마주했다. 말뚝에 둘러 자물쇠로 잠긴 채였다. 당황한 K는 가까이 다가갔다.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 신고했거나 관리인이 K의 흔적을 본 모양이었다. K는 수풀 속에 흐릿한 빛의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며칠간은 달이 점점 기울 테고, 다시 차오르려면 1주일은 기다려야 했다. 처음 있는 기다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K는 이유 없이 직감했다. 다시는 도깨비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G시에서의 전화통화에서 Y는 함께 달동네를 돌아다니던 때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K는 그렇다고 답했고, Y는 그때 마주한 너무 많은 진심들을 기억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K는 또다시 그렇다고 답했다. Y는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무기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고 했다.


동료 연구원들은 모두 Y가 떠난 이유를 박봉 탓으로 알고 있었다. Y는 스스로를 비겁하다 여겼지만 적어도 K에겐 변명하지 않았고, 그것이 K에겐 늦은 위안이 되었다. K는 바뀐 G시를 Y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Y가 걷는 길이 우회하는 길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 바퀴를 다 걸으면 돌아오는 길일 거라 믿었다.


 

K는 도깨비와 보냈던 짧은 날들 사이, 가장 즐거웠던 보름날을 기억했다. 기울고 차는 달. 달과 함께 나타났다 사라지는 나의 친구. KK-도깨비는 이걸 마셔줘야 한다며 특별히 준비한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흥이 오른 그들은 보트를 한편에 매어 두고 산책로를 따라 앞구르기 내기를 했다.


-명색이 도깨비인데 구미 당기는 내기 좀 걸어줘 봐. 다른 도깨비들은 방망이로 금은보화쯤은 뚝딱이라던데?


-이거 아무리 봐도 팔다리가 있는 내가 불리한 거 같아.


K가 수 차례 볼멘소리를 했지만 도깨비는 얄미운 빛을 띠며 속도를 냈다. 미친 듯이 웃으며 구르다 보니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래도 구르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보면 다시 배가 있는 곳으로 한 바퀴를 다 구르고, 그러면 다시 뱃놀이를 하러 갈 것이다. 그때의 K에겐 옷과 머리에 흙먼지가 뒤덮여도 괜찮았다. 머리는 감으면 되고 옷은 깨끗이 빨래하면 되니까.


7시가 되면 해가 뜨고, 도깨비는 옅어지고, K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뒤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K는 언젠가 도깨비를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도깨비가 그리워질 땐 열심히 일상을 살아내고 어디에서건 하늘에 뜬 달을 보며, 달의 이름을 한 이 저수지를 돌면 된다. 그리고 빛으로 소리로 마음으로 말을 걸면 된다. 그러다 보면 운 좋게 다시 돌아오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K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윤소정(건축 16)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