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여준 기자 (yjyj0120@skkuw.com)

은유는 “어떤 사물에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으로 흔히 정의된다. 은유는 일상에서 여러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사고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막론하고 복잡한 이론과 학설을 설명해낼 때는 각종 은유가 동원된다. 또 복잡한 학설과 이론은 은유를 매개로 대중에게 보급되고 소비된다.

은유는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명확하다. 이해하기 복잡한 문제를 간단히 다른 사물의 이름을 빌려 설명하면서 문제가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경우가 있다. 단순화는 왜곡이기도 하다. 문제를 곡해하면 여러 다른 부작용이 발생한다. 지나친 공포를 조장하거나, 특정 집단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식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부작용을 악용하려 들기 마련이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을 통해 질병이 은유로 소비되는 현상과 그 부작용을 비판한다. 대중이 질병을 은유로 소비하는 방식과 그 결과로 환자가 겪는 억압과 멸시를 조명한다. 질병은
“A는 B다”의 형식으로 쓰이는 은유에서 A와 B 모두에 들어간다. 질병이 A로 쓰이는 은유는 환자를 위축시키고, 병의 원인을 환자 자신으로부터 찾게 만든다. 환자는 질병 자체만이 아니라 질병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과도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한편 질병이 B로 들어가는 경우 은유가 일으키는 문제의 양상이 달라진다. 질병은 때로 군사 용어와 함께 다뤄지면서 권위주의적 정책을 정당화하는 은유에 동원되기도 한다. 

'은유로서의 질병' 안에는 결핵과 암을 다루는 ‘은유로서의 질병’, 에이즈를 둘러싼 은유를 다루는 ‘에이즈와 그 은유’ 두 편의 글이 수록돼 있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결핵, 매독, 암이 여러 문학적·정치적 텍스트 속에서 쓰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의학이 발달하기 전 결핵과 암은 병인이 불분명하고, 환자를 틀림없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이었다.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질병은 사뭇 다른 맥락 속에서 쓰인다. 발병 부위, 병의 진행 양상, 병인 등 질병마다 다른 여러 특징은 질병에 각기 다른 상징을 부여한다.

‘에이즈와 그 은유’에서 폭로되는 에이즈에 관한 은유도 암과는 차별화된 상징을 드러낸다. 손택은 에이즈의 전염성, 전염경로, 잠복성에 들러붙는 갖가지 상징을 파헤친다. 특히 에이즈는 은유를 통해 두 가지 모순된 상징을 띠게 된다. 에이즈는 빈민·동성애자·성적으로 문란한 사람 등 ‘그들’의 질병이라는 관념, 그리고 우리 사회를 오염시키고 침투하는 ‘우리’의 질병이라는 관념이다. 전자는 지극히 도덕주의적인 관점으로, 에이즈가 비정상적 행위를 향해 내려지는 징벌이라는 인식을 부추긴다. 반면 후자는 인간의 욕망을 한계짓지 않던 자본주의적 관념에 반해 육체의 한계와 절제라는 미덕을 부각했다.

의학의 비약적 성장을 이룬 21세기, 우리는 질병에 관한 은유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농담에 가깝긴 하지만, 인터넷 일부에서는 코로나19를 두고 ‘지구의 자정 작용’이라는 표현을 쓴다. 여러 매체에서도 코로나19 이후 회복된 자연 생태계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했다. 한정된 지면에서 코로나19를 둘러싼 최신 은유를 나열하고 검토해보기는 어렵다. 다만 수전 손택이 세상을 떠난 지금, 그의 책에 담긴 통찰을 빌어 우리가 사용하는 코로나19에 관한 여러 표현을 자가 점검해봐도 좋겠다는 말은 할 수 있겠다.

황여준 기자 yjyj0120@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