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여준 기자 (yjyj0120@skkuw.com)

인사캠 만남-허난영(한국철학 88) 동문

사진 김가현 기자 dreamer7@
사진 김가현 기자 dreamer7@

 

세종문화회관에 숨겨진 VIP룸으로 안내받았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죠?” 
세종문화회관 허난영(한국철학 88) 예술단전략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도전, 실패, 새로운 발견으로 점철되는 허 동문의 인생을 그곳에서 들어봤다.

세 번 좌절된 역사학자의 꿈, 덕분에 공연기획자로 살게 돼
미리 좌절하기보다는 현실에 충실히 살아야

 

‘인디아나 존스’를 꿈꿨던 어린 시절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허 동문은 어린 시절 전혀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활동적이었던 허 동문은 영화관에서 본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좋아했다. “커서 4대 문명 유적지를 탐험하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해리슨 포드처럼 완전히 새로운 발견을 하길 꿈꿨죠.” 탐험가의 꿈을 간직한 채 고등학교에 입학한 허 동문은 사학과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꿈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원하는 학과로 진입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사학과가 아니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지망 학과도 쓰지 않겠다고 했죠.” 그의 바람과 달리 주변 어른들은 허 동문을 대학으로 등 떠밀어 보내려 했다. “선생님이 저 몰래 2지망 학과로 한국철학과를 썼어요. 당연히 저는 재수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바로 등록금을 내버리셨죠. 그렇게 있는 줄도 몰랐던 전공을 얻어 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좌절된 역사학도의 꿈, 방황했던 20대
그는 역사학자가 되기 위해 세 번의 도전을 했다고 말했다. 그 중 첫 번째가 사학과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인생의 첫 번째 도전이 실패하고 대학을 왜 다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저랑 비슷한 친구가 두 명 있었는데, 1학년 내내 세 명이 모여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만 한 것 같아요.” 1학년이 끝나고 함께 놀던 친구들은 각자의 길을 떠났다고 허 동문은 회상했다. “한 친구는 전공에 적응하기로 하고, 다른 한 친구는 재수하기로 했어요. 저도 2학년부터는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학년에 된 허 동문은 휴학하고 사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를 시작했다. 역사학자가 되기 위한 두 번째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 번 실패의 쓴맛을 겪어야 했다. “열심히 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요. 역사와는 내가 인연이 없나, 역사는 독학해야 하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과를 받아들이고 복학하고는 학교생활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죠. 전공이 인생을 결정하지는 않으니까요.”

이후의 학부 생활을 회고하며 허 동문은 말했다. “제가 재학하던 시기가 학생 운동이 가장 활발했잖아요. 우리 학교는 특히 그 운동의 중심에 있었어요. 그 흐름을 거스르긴 힘들었죠. 다들 그 흐름에 속해 있으면서 각자의 진로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저도 그 속에서 살다보니 졸업을 했네요.”
 

공무원으로 지낸 4년, 
그 끝에 열린 새로운 길

학부생으로 지낼 때만 해도 허 동문은 자신이 공연기획자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는 자주 봤지만 다른 종류의 공연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오페라나 연극은 상대적으로 비쌌거든요. 학생인 저한테는 굉장히 멀게 느껴졌어요.” 졸업 이후에도 허 동문은 여전히 역사학자로서의 꿈을 놓지 않았다. 오래된 꿈을 향한 세 번째 도전을 위해 허 동문은 대학원 진학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꿈을 위한 그의 마지막 도전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주변 친구들보다 사회 진출이 늦은 상태였다. 결국 허 동문은 대학원 진학을 단념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허 동문은 졸업 이후를 회고하며 겸연쩍게 웃었다. “일자리도 많은 좋은 시대에 태어났는데, 학점이 낮아서 취업이 어렵겠더라고요. 학원 강사도 해보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안정적인 직업이 있었으면 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어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그는 서울시에서 행정공무원으로 일했다. 허 동문은 공무원으로서 지낸 4년을 가장 보람없이 보낸 시기로 꼽았다. “어렸을 때부터 역동적인 활동을 좋아했는데, 공무원으로 속해 있던 조직은 저랑 정말 안 맞더라고요. 공무원으로 지낸 4년 동안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공무원으로 지낸 세월은 허 동문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줬다. “당시에 제 팀장님이었던 분께서 제게 세종문화회관 채용 공고가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공무원으로 지낸 아까운 시간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거죠. 그때 인생이란 정말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공무원 생활에 보람을 느끼지 못할 무렵 허 동문은 곧바로 세종문화회관에 지원서를 냈다. 행정공무원으로 지낸 4년은 그에게 좋은 경력이 돼줬다. 덕분에 그는 경영 및 관리 업무를 하는 부서에 합격할 수 있었다. 허 동문은 세종문화회관에 들어가면서 얻은 깨달음을 설명했다. “공무원으로 지낸 4년을 허비했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든 거죠. 인생에서 필요 없어 보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도 그 순간에 충실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세종문화회관에 내디딘 첫발, 공연기획자로 거듭나기까지
허 동문이 세종문화회관에 입사하자마자 공연기획자로 활동한 것은 아니다. 2년 동안은 공연기획과는 무관한 경영 업무를 맡았다. 허 동문은 안정적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기껏 세종문화회관에 들어왔는데, 이곳에 맞는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공연기획과 관련된 부서로 옮겨달라고 인사담당자에게 요청했죠. 굉장히 단호하게 반려하시더라고요.” 당시에는 예술 분야에 조예가 부족했던 허 동문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그는 세종문화회관 업무와 대학원 공부를 병행했다. 그렇게 허 동문은 우리 학교 대학원 예술학협동과정에서 공연 예술학을 전공하게 됐다. “당시는 공연장이 많이 생기고, 또 여러 공공 공연장이 법인화되던 시기였어요. 시기가 좋았죠. 저도 관련 분야에서 정말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더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했어요.” 허 동문은 우리 학교 대학원을 선택한 이유로 ‘거리’를 들었다. “밤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일해야 했거든요. 멀리 있는 대학원을 다닐 수는 없었죠.”

대학원에 진학한 허 동문은 목표하던 공연기획 업무를 맡을 수 있었다. 석사학위 취득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는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그는 공연기획이라는 업무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연기획자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콘텐츠는 예술가가 만들고, 공연기획자는 그 콘텐츠를 공연이라는 형식으로 키워내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하나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AI와 홀로그램 등 첨단 기술과 공연의 융합을 시도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공연에 참여한다. “예술가가 자신이 상상한 콘텐츠를 구현해달라고 요청하면 기술자들은 난색을 보일 때가 많죠. 한정된 예산을 두고 여러 부서가 경쟁하기도 하고요. 그런 갈등을 조율하고 최선의 형태로 공연을 빚어내는 게 공연기획자의 역할이에요.”

공연기획자로 지내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화를 묻자 허 동문은 2016년 광화문 촛불 집회가 열렸을 때를 회상했다. “공연기획팀장이 되면 공연 중에 발생하는 모든 돌발 상황에 대처할 책임이 생겨요. 한 번은 광화문에서 큰 시위 집회가 열렸는데, 시위 인파가 너무 많아서 세종문화회관 안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오려고 했어요. 그때 진행 중이던 공연이 있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공연장 밖으로 안전하게 나가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죠.” 학회에 참석하던 중에 전화로 상황을 전해 들은 허 동문은 곧바로 대처 방안을 생각해내야 했다. “인파가 몰려서 문이 파손되는 걸 막기 위해 우선 회관의 출입문을 모두 개방했어요. 공연이 끝난 관객들을 우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대기시키고, 안내 방송으로 급하게 시위 인파를 인솔했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러 결정들을 내려야 했어요. 돌발 상황에 빠르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공연기획자로서 꽤 중요한 자질인 것 같아요.”
 

공연기획의 베테랑이 되고 …  ‘공공 공연’의 역할을 고민하다
여러 공연과 프로젝트 기획에 참여하며 허 동문은 새로운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공 공연장이 민영화되고, 새로운 공연장들도 많이 생겼어요.” 그는 민영화된 공연장들이 경영자의 논리에 흔들리고, 공공예술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제대로 실현해내지 못하는 데 안타까움을 느꼈다. 9년에 걸쳐 쓴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그런 그의 고민을 담고 있다. 최근에는 『공공 공연장의 길』이라는 저서에 그가 오랜 시간 실무를 하며 쌓은 고민과 나름의 해답을 담기도 했다. “공연도 중요한 문화 자본으로써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잖아요. 문화 자본에는 여러 역할이 있지만, 적어도 공연만큼은 어떤 사람이든 접할 수 있게 기회를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공 공연장이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 앞장서야죠.”
 

20대에 결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로에 불안과 조바심을 느끼는 여러 대학생에게 건넬 조언이 있는지 묻자 허 동문은 “20대에 결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답을 했다. “20대 때 겪는 경험이 주춧돌이 될 수는 있죠. 제 인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30대가 될 때까지 제가 공연기획자로 살아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20대라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남들과 차별화된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면 좋겠어요.” 인생의 고비마다 떠올렸던 신념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허 동문은 “현재를 즐기자”라는 격언을 항상 되새겼다고 말했다. “꿈꾸고 노력한다고 항상 원하는 대로 이뤄지진 않아요. 아직도 저는 역사학자가 되지 못했다는 미련이 있어요. 그렇지만 뒤를 돌아보고 후회하지는 않아요. 현재에 충실하게 사는 게 인생을 대하는 최선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