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손민정 기자 (0614smj@skkuw.com)

나는 어쩔 수 없이, 혹은 당연하게도 그럼 무얼 부르지의 ‘나’에게 공감한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눈물을 찔끔 흘리고 가족과 함께 <택시운전사>를 관람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공감하고야 마는 ‘장막’이다. 뭘 어떻게 해도 그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안에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는 것이다. 작가와 공유하는 이러한 감정은 손정수 문학평론가의 말마따나 “미체험 세대가 ‘광주’라는 사건에 대해 갖는 솔직한 역사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문제적”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설령 내가 그러한 나의 감정에 이유 모를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감정은 심지어 동시대의 사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앞선 감정이 시간이라는 장막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공간이라는 장막 때문이다. 언론은 마치 우리나라의 일인 것처럼 연일 미얀마 관련 소식을 보도하고 시민들은 ‘1980년 광주가 2021년의 미얀마를 응원한다’는 구호와 함께 미얀마의 소식을 공유한다. 이에 나는 가슴으로 이해하고 머리로 분개한다. 그러나 여전히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장막을 걷지는 못한다. 책 속의 나는 해나에게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타이핑된 ‘외국 사람의 시 같은 시’를 받았지만, 현실의 나는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타이핑된 ‘외국 사람의 시’를 받았다. 더군다나 그 시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두 감각은 내가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런 장막을 느끼는 내가 감히 그것에 대해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순간적으로 아득함을 느끼고 고개를 휙 돌리고 반응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들이나 하지 않을까. 전혀 달지 않은 캔 커피 이야기 같은 거. 실제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오랫동안 의미 없이 망설였다. 

그런데도 내가 장막 너머의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가 그냥 언론도 아니고 학보사의 부편집장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든 생각은 그것이고, 그 이전에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과장해보자면 시민이고, 사람이고, 생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발언을 할 자격이 없을지언정 마땅히 말해야만 한다. 또 모든 것을 고민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그 의무감이 내가 느낀 죄책감 혹은 부채감의 강화된 형태일지라도 말이다. 

또한 나는 순서를 바꿔본다. 책 속의 나는 ‘모든 시제를 지울 수 있으며 그렇게 볼 수 있는 시간들은 점점 늘어나지만 나의 시선은 김남주의 시에 가닿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나의 시선은 외국 사람의 시에 가닿지 않지만 나는 모든 시제를 지울 수 있게 돼버렸으며 내가 볼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 버렸다고 말하겠다. 내가 볼 수 있는 시공간은 장막 너머로나마 점점 늘어났고 나는 장막 너머로나마 봐버렸다. 

음. 어쩌면 그것이 세상 모든 외국 사람의 시 같은 시들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손민정 부편집장 
0614smj@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