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류현주 (hjurqmffl@skkuw.com)

앞선 사회부 기사에 나왔듯 드디어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어쨌든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는 현행 법제의 변화는 언제나 환영한다. 하지만 오늘은 낙태에 대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정 이전에도 법은 어떤 이들에게 낙태를 허용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낙태, 즉 인공임신중절을 권장했다. 그들은 바로 장애인이다.

나는 독립출판물을 읽기를 즐긴다. 내가 독립출판물을 고르는 기준은 딱 하나다. 내 외출용 작은 가방에 들어가는가. 독립서점에서 그저 작은 책을 찾던 중 이제는 누군가의 수필로 감정의 세계를 탐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모르는 사회를 마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고르게 된 책이 권리는 호의가 아니다, 장애인권 월간지 <함께걸음>에 실린 기사 일부를 편집한 책이다. 그때는 몰랐다. 70쪽도 되지 않는 손바닥만 한 이 책이 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줄 것인지. 

열등한 인종은 사라져야 마땅하다는 우생학은 전근대적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모자보건법 안에도 우생학은 숨어있었다. 1973년 만들어진 모자보건법 제9조에는 특정한 우생학적 장애나 질환이 있는 환자를 발견한 의사는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에 보고해야 했고, 장관은 환자가 불임수술을 받도록 명령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물론 이 조항은 1999년 인권침해논란으로 폐지됐다. 또한 당시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한 장애 중 하나는 ‘현저히 유전성 범죄 경향이 있는 정신장애’였다. 이 항목은 2009년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인정돼 삭제됐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는 국가의 기준으로 ‘태어날 가치가 있는 인간’, 즉 태아의 질을 결정할 수 있었다. 물론 ‘어차피 장애인으로 태어나봤자 이 사회에서 살기 힘들기만 할 텐데 괜찮지 않나?’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들이 살기 힘든 세상을 바꾸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그들에게 사라져달라고 요청하고 있는가. 또한 유전병을 이유로 인공임신중절이 허용된다는 것은 태초의 그 유전병 보유자를 이 사회가 규정한 ‘태어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셈이다. 내가 속해있는 사회가 법률적으로 나와 같은 사람의 출생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 순간, 우리는 그 감정을 헤아릴 수 없다. 장애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들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분명 다르다. 이는 연민을 내세운 혐오일 뿐이다.

지난봄, 혜화역을 지나가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를 본 적이 있다. 마침 그 영화의 감독이 소감을 말하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장애인인데 영화를 찍다니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부끄러웠다. 그 감독은 그저 좋은 영화를 제작했기에 대단했을 뿐, 그가 장애인이어서 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 세대도 장애인식이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개선됐을 뿐, 아직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그들에 대한 연민이나 일말의 불편함이 순간 들더라도 마음속으로 이것이 잘못됐음을 인지하며,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 후대에는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당연히 익숙해야 할 것들에 아직도 어색해하고 있다. 

 

류현주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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