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규리 기자 (kimguri21@skkuw.com)

액자속의 예술-영화 <로어>

미니멀리즘 음악이 
환기하는 영화의 주제

현악기가 드러내는 위태로운 심리

막스 리히터는 영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입니다. 미니멀리즘 사조를 대표하는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의도적으로 리듬이나 선율, 화성 등을 단순화시킨 작곡의 한 양식입니다. 보통 마디의 반복을 많이 사용하며, 음이나 박자에 변화가 많이 일어나지 않는 경향을 보입니다. 특정한 음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해, 마치 맥박과도 같다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는 클래식 음악에 한정되지 않고 많은 음악적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로어>에서는 그의 음악적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2012년 개봉한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의 <로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치달은 때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한네로어 드레슬러(이하 로어)는 유년과 성년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여동생 리젤은 놀이에 열중한 반면, 욕조에서 몸을 씻는 로어는 고요한 모습으로 대비를 보여줍니다. 이때 스크린 이면에서는 앰비언트 스타일의 마단조의 트랙이 흘러나옵니다. 앰비언트는 반복적이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멜로디 구조를 부각하는 음악으로, 특유의 잔잔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주력하는 장르입니다. 피아노로 제시되는 주선율에선 동일한 길이를 가진 음이 전 마디에 균일하게 배분됩니다. 첫 마디의 음은 지속적으로 1도씩 상승하다가 으뜸음으로 회귀합니다. 별다른 고저 없이 반복되는 멜로디는 평온을 가장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현악기가 긴박하게 움직이며 기저에 깔린 위태로움을 보여줍니다. 

영화가 전개되며 나치 고위 간부인 로어의 아버지는 자살하고 어머니는 감옥에 갑니다. 장녀인 로어는 남은 동생들을 이끌고 함부르크에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가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텅 빈 민가를 돌던 로어는 ‘토마스’란 인물을 만나는데, 이때 바이올린의 E 현을 활용한 날카로운 선율이 언더스코어로 제시됩니다. E 현은 바이올린의 네 현 중 가장 높은 소리를 내서 귀를 자극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로어의 시선 속 토마스에게서 비밀스럽고 위협적인 인상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윽고 토마스가 소지한 유대인 여권을 본 로어는 부모의 영향을 받은 반유대주의 사상을 토마스에게 재생산합니다. 그러나 미군이 점령한 독일 땅에서 이동하기 위해선 토마스의 유대인 여권에 의지해야해 로어의 내면에는 무력감과 분노가 쌓여갑니다. 토마스는 로어의 남매를 따라오고, 로어는 그의 존재를 인내하다가 마침내 수용합니다. 그러다 남동생 위르겐이 토마스의 여권을 훔치고, 토마스와 거칠게 이별하게 됩니다. 

로어의 남매는 마침내 외할머니 집에 도착합니다. 외할머니는 위계질서를 엄격히 요구하며 나치의 가치체계에 대한 지속적인 애착을 보입니다. 카메라가 무기력하게 누운 로어를 비추는 동안, 마단조의 딸림음을 중심으로 한 토마스의 테마 선율이 서정적인 피아노 반주와 함께 흘러나옵니다. 처음 토마스를 만났을 때 들었던 날카로운 선율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 선율은 옥타브를 오르내리며 글리산도의 효과를 냅니다. 

글리산도는 넓은 음역을 빠르게 미끄러지듯 소리를 내는 현악기 연주법입니다. 주로 높이가 다른 2음이 있을 때,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손가락을 옮기며 둘 사이에 있는 모든 음을 통과해 목적음에 이르는 방식이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엔딩 크레딧에서도 동일한 선율이 사용되는데, 피아노 반주에서 화음을 한꺼번에 소리 내지 않고 펼쳐 연주해 씁쓸한 여운을 상기시킵니다. 

영화는 로어가 구둣발로 할머니의 도자기 인형을 짓밟는 모습을 보여주며 나치주의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맺음합니다. 폭력적으로 매듭지어진 유년, 전쟁 이후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게 남은 채입니다. 
 

왼쪽부터 욕조에서 몸을 씻는 로어. 토마스와의 만남. 할머니 집에서 무기력한 로어.
ⓒ영화 <로어>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