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유림 기자 (yu00th@skkuw.com)

10년 전, 김주원이 “길라임 씨는 몇 살 때부터 그렇게 예뻤나?” 하며 길라임에게 반했을 때, 우리는 길라임이 선보이는 멋진 액션에 반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당시엔 생소했던 스턴트우먼이란 직업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길라임의 스턴트우먼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바로 유미진 스턴트우먼이다. 그는 현재 11년 차 베테랑 스턴트우먼이자 3년 차 무술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유미진 스턴트우먼·무술 감독을 만나 그의 액션 외길 인생을 들어봤다. 

 

어떻게 스턴트우먼이 됐는가.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어요. 하루하루 자신의 한계를 깨나갈 수 있다는 점이 재밌었어요. 저는 기억 안 나지만 제가 5살 때 체육관 앞을 지나갈 때마다 도복 입고 싶다고 떼를 쓰며 울었대요. 그래서 5살 때 합기도를 시작으로 태권도, 검도, 킥복싱을 하며 무술 12단이 됐죠. 운동을 좋아하니 막연히 청와대 경호실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어요. 스턴트우먼이란 직업은 있는지도 몰랐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바로 취업했어요. 운동으로는 돈을 못 번다는 어른들의 압박에 따라 한 선택이었죠. 그런데 3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월급날만 바라보고 살면 앞으로도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체대에 들어갔지만 2학년으로 올라갈 때쯤 이 길도 제 길이 아닌 거 같더라고요. 그러던 중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서울액션스쿨 14기 모집 공고를 보게 됐어요. 보자마자 ‘내가 갈 길이 이 길이다’란 생각이 들었죠.           

서울액션스쿨에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사실 제가 공고를 본 날이 모집 마감일 다음 날이었어요. 그래서 그날 바로 전남 순천에서 짐을 싸고 올라와 다음 날 액션스쿨로 갔죠. 무술 감독님이 어디서 왔는지와 나이를 물어보시고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부모님 걱정시키지 말고 집에 가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스턴트우먼이 국내에 열 명도 채 안 됐고 마른 남자가 여자 대역을 할 때여서 그러셨던 거 같아요. 그래도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니까 감독님이 이력서를 보시고는 내일 나오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서울액션스쿨 14기 신입생이 됐어요. 오디션을 보지 않고 특채로 액션스쿨에 합격했죠.

훈련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1교시는 워밍업으로 30분 동안 5㎞ 산악구보와 선착순 뛰기, 윗몸일으키기 등을 해요. 2교시는 손발로 하는 현대 액션, 3교시는 무기를 사용하는 액션을 하고 마지막 4교시는 기계체조를 해요. 이렇게 매일 1시부터 5시까지 6개월 동안 기초훈련을 받아요. 6개월이 끝나면 이곳에 남을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어요. 스턴트 배우의 길을 가고 싶은 훈련생들은 액션스쿨 팀원이 될 자질이 있는지 시험을 봐요. 합격하면 다시 6개월 동안 심화훈련을 받게 되죠. 이렇게 총 1년을 거치면 본격적으로 스턴트 배우로서 활동할 수 있어요. 저희 훈련이 악명 높기로 유명해요. 특수부대 나온 친구들도 군 생활 두 번 하는 것 같다고 나가기도 했죠. 그만큼 힘들었지만 재밌었어요. 종종 또래 친구들보다 뒤처진 것 같아 불안감이 들더라도 몸이 힘드니까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더라고요. 

첫 작품이 ‘시크릿 가든’이다. 어떻게 캐스팅이 됐는가. 
보통 1년 동안의 훈련을 끝내고 데뷔를 하는데 저는 이례적으로 훈련 3개월 차에 캐스팅이 됐어요. 당시에 제가 액션스쿨로 출근하는데 근처 카페에서 서울액션스쿨 대표 정두홍 감독님과 어떤 여성분이 대화 중인 걸 봤어요. 인사를 드렸더니 감독님이 제 키랑 몸무게를 물어보시더라고요. 그 후로 몇 번 단독 훈련을 하다가 어느 날 감독님의 부름에 나갔는데 그곳이 ‘시크릿 가든’ 촬영 현장이었어요. 카페에 있던 여성분이 ‘시크릿 가든’을 집필하신 김은숙 작가님이었고 단독 훈련은 하지원 씨(길라임 역) 대역 연습이었던 거죠.

당시 활동하는 스턴트우먼 중에 하지원 씨와 비슷한 체구인 분이 없었어요. 대역은 체구가 특히 중요하기 때문에 아직 실력은 부족하지만 체구가 비슷한 제가 하게 된 거죠. 그리고 정 감독님이 제가 많이 간절하다는 것도 아셨던 거 같아요.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고 이 길을 택했기에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어요. 밤새 아르바이트하고, 아침에 출근해서 매트리스에서 자고, 일어나서 악착같이 훈련했죠. 이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기회를 주신 거죠.

‘시크릿 가든’에서 묘사된 스턴트 배우의 모습 중 공감되거나 실제와 다르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면. 
드라마에서 길라임과 액션스쿨 식구들이 제사 지내러 가는 장면이 있어요. 실제로 저희도 기수 입학식과 졸업식 날에 돌아가신 선배님들께 인사드리러 가요. 그리고 드라마에서 액션스쿨 감독 역을 맡은 이필립 씨가 밤늦게 오는 전화는 받기 힘들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 부분은 김 작가님이 정 감독님과의 인터뷰에서 따오신 부분이에요. 예전에 한강대교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수심이 낮은 곳으로 떨어져 돌아가신 선배님이 계세요. 당시 무술 감독님이 정 감독님께 밤늦게 전화해서 아무 말도 못 하시니까 정 감독님이 “죽었어? 살았어?”라고 물으셨어요. 드라마에 정 감독님 말씀이 그대로 나와요. 그 밖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촬영 현장에서 스턴트 배우가 감독이나 배우한테 무시 받는 상황들은 실제와 달라요. 어떤 일을 하든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시크릿 가든’ 종영 이후 어땠는지. 
일단 그해 액션스쿨 여자 지원자 수가 몇 배로 늘었어요. 그만큼 이 드라마를 통해서 스턴트우먼이란 직업이 많이 알려졌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3, 4년이 지날 때까지 작품이 거의 안 들어왔어요. 간단한 대역 몇 개를 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죠. 당시에는 스턴트우먼 일 자체가 많지 않았어요. 스턴트맨의 경우, 건달이 몇십 명씩 나오면 그중 한 명으로 들어가 막내 때부터 실습하며 경력을 쌓을 수 있어요. 반면 여자가 떼로 나와 액션을 하는 장면은 거의 없었고, 있어도 남자 여럿에 여자 한 명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스턴트우먼이 일할 기회가 별로 없었죠. 그래서 특히 스턴트우먼은 실력이 완성돼야 현장에 나갈 수 있어요. 저도 그랬고요. 

그 이후에는 워낙 작품을 많이 해서 기억이 다 안 나요. 대표적으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 씨(고애신 역), 영화 <기생충> 이정은 씨(문광 역), <걸캅스> 라미란 씨(박미영 역) 등의 대역을 했죠. 그밖에 영화 <암살>, <인랑> 등과 드라마 ‘킹덤’ 등의 작품을 했고 최근에는 드라마 ‘편의점 샛별이’에 참여했어요.

스턴트 배우가 작품에 참여하기까지의 과정은. 
먼저 무술 감독이 작품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액션디자인을 해요. 배우의 체구를 확인한 후, 액션 실력이 되고 체구가 비슷한 스턴트 배우를 섭외하죠. 무술 감독은 스턴트 배우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액션을 할지 설명해요. 그 후 스턴트 배우는 해당 역의 배우와 함께 3개월 정도 훈련해요. 어느 정도 연차가 된 스턴트 배우는 배우의 액션 지도도 같이 진행하죠. 영화 <걸캅스>의 경우, 박미영 캐릭터는 레슬러 출신 형사예요. 그럼 저는 레슬링 기술을 따로 연습하고 필요한 액션들을 뽑아 배우 몸 상태에 맞게 지도하죠. 또 배우의 뛰는 모습 등을 파악하고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해 연습해요. 이렇게 배우와 함께 호흡을 다듬어가며 작품에 들어가요.    
                      
스턴트 배우로 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전이 가장 중요해요. 몸을 사라지 않고 목숨을 걸 정도의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그래도 다치지 않는 것이 필수이자 실력이죠. 현장에서 다치더라도 내색하지 않는 것도 필요해요. 이 일을 하며 부상을 입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저도 여러 번 죽을 뻔했죠. 영화 <해무>에서 제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달아놓은 와이어 줄이 옷에 걸려서 제가 물속에서 못 나왔어요. 다행히 상대 역할을 맡은 선배님이 절 꺼내주셨죠. 그 밖에도 오토바이를 타다가 넘어져야 하는데 다리가 껴서 질질 끌려가거나 땅에 머리를 박아서 기절하는 일들이 있었죠. 어떻게 보면 직업병인데 스턴트 배우끼리는 웬만한 상처에 놀라지 않아요. 살이 찢어지거나 뼈가 부러지면 ‘몇 개월 쉬면 되겠네’ 하고 마는 정도죠. 그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 일을 해냈을 때 느끼는 보람이 큰 것 같아요. 

여성 액션 드라마·영화가 많아졌다. 스턴트우먼의 참여 기회도 늘었을 것 같다. 
스턴트우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옛날보다 많아졌죠. 제가 스턴트우먼 일을 시작했을 때는 ‘시크릿 가든’ 외로는 여성 액션을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또 액션이 있어도 수동적인 액션이 많았어요. 그때 주로 했던 액션이 넘어지거나 남성 캐릭터한테 맞는 일이었죠. 최근에는 여성 캐릭터가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며 액션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센 언니 같은 캐릭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싸움을 잘하는 여성 캐릭터도 많아졌죠. 스턴트우먼도 그에 맞춰 예전보다 다양한 액션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최근에는 무술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무술 감독은 어떤 일을 하는가. 
현재 허명행 무술 감독님 밑에서 일을 배우며 무술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영화 <돈>을 시작으로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영화 <반도>에 참여했고 다른 작품들도 준비 중이죠. 무술 감독은 시나리오를 읽고 캐릭터를 분석해 캐릭터의 성격에 맞는 액션을 구상해요.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배운 캐릭터가 와이어를 타고 칼싸움을 하면 이상하듯, 전체적인 시나리오에 맞게 액션을 입히는 거죠. 액션 설계 후 스턴트 배우와 함께 동영상 액션 *콘티를 찍어요. 그리고 스태프 회의에서 영상을 보며 연출, 촬영 감독과 의견을 주고받죠. 이렇게 회의를 거쳐 모든 액션을 짜면 촬영에 들어가요. 현장에서 액션이 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테이블을 밟고 일어나 상대를 차는 것보다 유리컵을 던지는 게 더 좋게 표현될 거 같으면 현장에서 수정하는 거죠. 스턴트 배우는 몸으로 액션을 표현한다면 무술 감독은 액션을 화면에서 어떻게 표현해낼지 고민해요. 액션을 잘 알고 잘 다뤄야 하죠. 그래서 스턴트 배우를 거치지 않고서는 무술 감독이 절대 될 수 없어요.

앞으로 어떤 스턴트우먼이자 무술 감독이 되고 싶은가. 
저는 액션 장면을 영리하게 잘 찍고 후배 스턴트 배우들이 다치지 않는 현장을 만드는 무술 감독이 되고 싶어요.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배웠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해요. 주로 무술 감독으로 활동할 예정이지만, 작품이 들어오거나 후배 스턴트우먼들이 하기엔 너무 어려운 액션이면 지금처럼 제가 할 예정이에요. 앞으로 인정받고 유명해지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관객분들이 스턴트 배우나 무술 감독의 존재를 굳이 알 필요 없어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 액션 장면 멋있었어’라고 한마디씩 해주시는 게 최고의 칭찬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콘티=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을 위하여 각본을 바탕으로 필요한 모든 사항을 기록한 것.

유미진 스턴트우먼·무술 감독.
사진 l 옥하늘 기자 sandra0129@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속 액션 장면.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캡처
영화 〈걸캅스〉 액션 지도 현장.
ⓒ유튜브 '라미란의 통쾌한 '백드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캡처​​​

 

드라마 '시크릿 가든' 속 액션 장면.
ⓒ드라마 '시크릿 가든' 캡처

 

영화 〈반도〉에서 무술 감독으로 참여할 당시 현장.
ⓒ유미진 감독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