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

 자과캠 만남 - 임종덕(생물 86) 동문

사진l 박주성 기자 pjs970726@
사진l 박주성 기자 pjs970726@

“진짜 공룡 화석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전율, 아직도 잊을 수 없죠.”
공룡 모형을 손에 들고 이야기하는 임종덕(생물 86) 동문의 눈이 열의로 반짝였다. 화석을 직접 발굴하고 연구할 뿐 아니라 
저서와 박물관 전시기획 등 과학문화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는 임 동문을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만났다.

공룡도 모르던 소년이 화석전문가가 되기까지 
계획을 짜고 철저히 준비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동물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어렸을 때부터 동물에 관심이 많았던 임 동문은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 몰래 집에서 개미를 기르다가 박스에서 탈출한 개미가 부엌에서 발견돼 집안이 뒤집어진 적도 있었죠.”(웃음) 그는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 시청과 동물원 견학을 좋아했다고 한다. “‘동물의 왕국’을 보거나 동물원에 가는 것 모두 지금껏 남아있는 취미 중 하나예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꼽으라면 단연 ‘동물의 왕국’을 선택할 정도죠.”

‘고래’를 좋아했던 생물학도
학창 시절에도 동물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임 동문은 우리 학교 생물학과(현 생명과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생물학과 수업을 좋아했다. 궁금한 것을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기에 더욱 재밌었다고 밝힌 임 동문은 공부도 열심히 했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열심히 못 할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더 놀지 못해 아쉬워요.” 그런 임 동문에게도 어려운 과목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유학 과목(지금의 ‘성균논어’). 임 동문은 “유학 과목은 C+를 맞았어요. 올해 성대를 졸업한 딸이 ‘그 쉬운 과목에서 왜 C+를 받았냐’며 지금도 놀리곤 해요.”라고 덧붙였다.

임 동문의 생물학과 재학시절, 유전공학 붐이 시작돼 유전학이나 분자생물학이 인기를 끌었다. “남들이 다 하는 걸 하긴 싫었어요. ‘남들이 안 하는 걸 하자’, ‘좁은 길로 가자’ 이 두 가지가 제 모토거든요.” 임 동문은 동물 중에서도 특히 고래를 좋아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선 고래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다고 한다. 고래 연구의 선구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임 동문은 해양생물에 특화된 과가 있는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준비했다.

“제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3가지가 있어요. ‘Plan’, ‘Prepare’, ‘Perform’. 줄여서 3P죠.” 미국으로의 유학을 ‘계획’한 뒤로 임 동문은 영문학과 화학을 복수전공하려 했을 정도로 미래를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영문학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화학은 그곳에서 배울 필수과목들을 미리 듣고 가기 위해 전공하기 시작했어요. 두 전공 다 3학점씩 부족해 끝까지 이수하지는 못했지만 제 스스로가 공부한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영어 공부를 위해 임 동문은 영어 연구 동아리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유학을 준비할 당시 영자신문을 읽고 토론하면서 영어 실력을 키우고 싶었는데 명륜과 달리 율전에는 그런 동아리가 없었어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죠.” 게다가 당시엔 유학 관련 정보를 얻기 어려워 도서관에서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며 정보를 직접 찾아야 했다. 관련 서류 역시 직접 손으로 써서 대학 측과 편지로 주고받았다. “가고 싶은 대학에 직접 찾아가 답사까지 할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했죠”라고 임 동문은 전했다.

터닝포인트, 화석과 마주하다
그렇게 유학을 준비하던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유럽의 한 자연사박물관에서 공룡의 화석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임 동문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 거대한 뼈를 직접 보고 만졌을 때의 전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화석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만 해도 공룡이 유니콘 같은 상상 속의 동물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당시 우리나라에서 화석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야였기 때문이죠. 그 때, 이건 책으로만 공부할 게 아니라 내 인생을 걸어도 될 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라고 직감했어요.”

험난했던 유학 생활
임 동문은 화석을 연구하는 척추고생물학 공부를 위해 졸업 후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수많은 동물에 관해 공부해야 했다는 점이었어요.” 임 동문은 당시의 고충을 털어놨다.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좁을 뿐 아니라 기후조건이 전국 어디에서나 다 비슷한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동물의 다양성이 미국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죠. 듣도 보도 못한 동물의 학명을 외우는 것부터 시작해 그것의 구조나 특징까지 다 알아야 하니 정말 막막했어요.” 

또한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의 공부는 시간이 배로 걸렸다. 그랬기에 임 동문은 미국 학생들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더욱 발로 뛰며 노력했다. 야생동물을 실제로 볼 순 없으니 동물원에라도 가야겠다는 마음에 매주 동물원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그는 “공부량이 많아 매일 밤을 새워 공부했고,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 생기면 책의 요약본을 전부 암기했어요.”라고 덧붙였다. 임 동문은 당시 생겼던 오전 1~2시에 잠드는 생활패턴을 지금까지도 바꾸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털어놨다. “후배들에겐 저와 달리 아침형 인간으로 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길어지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으니까요.”

또 다른 이름, 전시연출가
임 동문은 미국 유학 생활 동안 자연사 박물관학과 지질학으로 석사 학위를, 척추고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러한 경력 덕분에 그는 10년의 유학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목포 자연사 박물관의 전체 총괄 전시연출을 맡게 됐다. 전시연출은 화석이 발굴된 후 박물관에 전시되기 위해 거치는 공간 및 프로그램 연출을 말한다.  처음 맡은 전시연출 업무는 쉽지 않았다. “원래 박물관의 총괄 전시연출은 건물이 지어지기 전에 이뤄져야 해요. 하지만 목포 자연사 박물관은 완공 후 이뤄지는 경우였죠. 쉽지는 않았지만, 첫 기회였던 만큼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목포 자연사 박물관을 시작으로 그는 국립중앙과학관과 국립과천과학관 등 전국의 다양한 박물관의 공룡 화석 전시 연출을 맡아 수행해 왔다. 그는 “박물관마다 겹치는 화석이 없고 각기 다른 연출을 하도록 신경을 썼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보존율 1위의 공룡화석을 한국에 들여오다
귀국 후 그는 박물관 전시기획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울대 연구교수로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공룡화석을 발굴하고 연구했다. 임 동문은 가장 기억에 남는 척추고생물학자로서의 업적으로 세계적인 학술 가치를 지닌 ‘보존율 1위 브라키오사우루스 화석’을 한국으로 가져온 것을 들었다. 외국의 공룡 화석을 우리나라로 가져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법적 소유권 문제와 더불어 발굴 및 운송에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어려워 보이는 일이어도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 실행에 전혀 문제가 없어요. 제가 말했던 3P의 일환이죠.” 유학 시절 한 농장으로 화석 발굴 연구를 나갔을 당시, 임 동문은 분명 또 다른 화석이 나올 것 같은 곳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 꼭 다시 와서 발굴해 보리라 다짐했어요. 농장 주인과도 친분을 쌓아두었죠.” 그 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임 동문은 한 박물관이 중앙홀에 전시할 공룡화석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미국에 사전에 점 찍어둔 부지가 있는데, 100% 화석이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며 관계자들을 설득했고, 마침내 화석 발굴 프로젝트의 발굴팀장이 되어 2년간 미국에서 화석 발굴과 이송을 책임지고 진행했다. 

“당시 농장 주인과 작업을 시작하기 전 보상금을 받는 대신 ‘화석이 발굴된다면 그 화석의 소유권은 한국에게 돌아간다’는 조건의 계약을 체결했어요. 그런데 막상 세계 최고 수준의 화석이 발굴되니 농장 주인이 마음을 바꾸더라고요.” 당시 발굴된 브라키오사우루스 화석은 머리뼈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온전히 발굴됐을 뿐만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보존율을 자랑했다. “농장 주인으로서는 위약금을 물고도 더 비싼 가격에 화석을 팔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학술 가치의 화석을 다른 나라에 선뜻 넘겨주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임 동문은 설명했다. 다행히 농장 주인이 임 동문과의 친분을 고려해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됐으면 좋겠다’며 화석을 넘겨주었고, 화석은 현재 계룡산 자연사 박물관의 중앙홀에 전시돼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화석 연구 시스템의 토대를 세우다
임 동문은 2006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연기념물센터의 학예연구관으로 공직에 발을 디뎠다. “학교에 있으면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연구를 지속해서 할 수 있고,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하지만 국가기관에서 일하면 ‘시스템’을 만들 수 있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국가의 예산으로 우리나라의 화석 산지를 보존하고 많은 학자와 관련 인력들을 지원할 수 있는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렇게 법으로 정비가 되면 그 학문 분야는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되죠.”

그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일하며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으로 국내 최초로 화석 표본 전문 '개방형 수장고'를 만들었던 일을 꼽았다. 개방형 수장고는 말 그대로 중요한 화석을 모아놓는 수장고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때로는 대중에게 개방돼 전시실의 역할을 하는 수장고를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석 전문 개방형 수장고를 내가 직접 기획하고 확보한 예산으로 지었단 건 정말 뿌듯한 일이었어요.”

함께 나누는 삶을 꿈꾸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연구 역량을 공유하고 재능을 기부하는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는 임 동문의 표정엔 미소가 가득했다. “방향이 같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자이자 선배가 되고 싶어요.” 그는 이런 목표를 위해 어린이를 위한 과학도서를 직접 저술하고 감수해 다섯 차례나 과학기술부 우수과학도서상을 받았다. “제가 어렸을 적 화석에 대해 접할 기회가 없다보니 상상력이 가장 풍부한 어린이들이 화석과 공룡에 대한 꿈을 키우는데 기여하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또한 임 동문은 2000년대 초 마음이 맞는 우리 학교 동문과 ‘장애인을 위한 과학탐구교실’ 봉사활동을 진행했다며 은퇴 후에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청춘이 되길
“동문과는 아직도 연락하며 끈끈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우리 학교 600주년 기념관이 지어질 때 동문회를 결성해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며 학교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끝으로 임 동문은 후배들에게 시도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처음부터 걱정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요. 특히 20대엔 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아요. 다양한 것,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경험하고 도전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