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안준혁 기자 (btino516@skkuw.com)

인사캠 만남 - 간호섭(의상 90) 동문

사진l 이지원 기자 ljw01@
사진l 이지원 기자 ljw01@

 

 

“패션계의 흥행배우로 남을래요.”
간 동문은 자신의 상징인 올 블랙, 검정 페도라까지 차려입고 나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줬다. 
홍익대 섬유미술패션학과 교수이자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간호섭(의상 90)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치대에서 뛰쳐나와 패션을 쫓다
의상학과 1호 남학생, 패션계를 흔들다

끼는 숨겨지지 않는다
레이스 양말에 빨간 샌들을 즐겨 신었던 간 동문은 어릴 적부터 미적 감각이 뛰어났다. “그때는 딱히 패션, 예술이 뭔지 잘 몰랐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상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그는 예술 분야에 두각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예중, 예고가 아닌 인문계 학교에 진학했다. 진학을 앞둔 시기마다 미술 선생님들은 간 동문에게 항상 예중, 예고를 추천했지만 성적이 아깝다는 이유로 그는 매번 인문계로 진학하게 됐다. 학창 시절 공부에 전념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성격이었던 간 동문은 결국 치대에 진학했다. “치대에 진학하게 된 것은 집안 분위기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는 교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감이셨어요. 여동생 역시 교수가 됐고요. 집안에서 예체능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으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제가 아이돌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거예요.” 그는 치대를 다니며 자신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용기를 내지 못하면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듯 치과의사는 제 길이 아니었어요.” 간 동문은 결심 후 치대에서 나와 의상학과를 가겠다는 목표로 재수를 시작했다. 예체능 공부를 거의 하지 않고도 모 대학 의상과에 합격한 그는 용기를 얻어 문과로 전향해 또다시 대입에 도전했다. 그에게는 우리 학교 의상학과에 진학하겠다는 굳은 목표가 있었다. “당시 대학에서 이과에 속하는 의상학과는 커리큘럼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문과에서 의상학과 위상이 가장 높은 대학교가 바로 우리 학교였어요. 그래서 목표가 이곳이었죠.” 간 동문은 삼수 끝에 우리 학교 의상학과에 진학했다. 

패션밖에 몰랐던 대학 생활 
당시 다른 대학에서는 의상학과가 가정대학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아 남학생이 많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간 동문이 진학하기 직전인 1989년부터 가정대학이 생활과학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그는 얼떨결에 우리 학교 의상학과 1호 남학생이 됐다.

한편 드디어 원하는 학과에 진학한 그는 4년 내내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제 고집대로 왔기 때문에 뭘 하든지 열심히 해서 학점을 잘 따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부모님께도 떳떳이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제 졸업학점이 4.34예요.” 스키에 자신 있었던 그는 학점을 잘 따야겠다는 생각에 교양과목으로 여름엔 수상스키를, 겨울엔 스키를 들을 정도였다. “제 학점은 공부를 잘했다기보다는 4년 내내 노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활동한 동아리가 있냐는 질문에 간 동문은 대학 시절 합창단을 했던 때를 되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전공 공부와 실기 탓에 동아리 끝난 후 2차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연습도 자주 나가지 못했죠.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옷을 맞춰 입고하는 발표회에도 나가지 못했어요. 학교생활 하며 유일하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게 동아리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간 동문은 학교에서 배운 모든 전공 수업이 오늘날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교양과목 역시 자신에게 중요했다고 한다. “‘서양미술의 이해’, ‘영화예술의 이해’ 등 영어로 번역했을 때 art가 들어간 수업은 다 들었어요.” 그는 ‘패션을 알기 위해서는 주변의 다양한 것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과목에 최선을 다했다. “대학 생활을 통해 성실함을 얻을 수 있었어요. 이러한 생활 태도가 유학 생활, 직장생활에서 모두 도움이 됐어요.” 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간 동문은 단호하게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때 충분히 했던 것 같고 돌아가서 더 열심히 할 자신도 없어요. 오늘 잘해야 내일도 있고, 모레가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 성실하면 금방 멋있는 과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패션으로 홀로서기 
우리 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한 후 간 동문은 미국에서 패션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이하 FIT)를 수료했다. 이후 필라델피아의 드렉셀대에서 석사 학위를 딴 후 그는 미국에서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했다. “FIT 다닐 때 패션쇼의 헬퍼로 잠시 일했어요. 그때 항상 백스테이지에서 디자이너들과 사진을 찍었죠. 그때 마침 일했던 곳인 '코킨'이라는 브랜드에서 디자이너 채용이 열렸어요. 열심히 작성한 포트폴리오에 '코킨'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넣었죠. 아마 그 사진이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운이 좋았죠.” 

간 동문은 학생으로서 만든 옷과 디자이너로서 만든 옷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뭐든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일과 그에 필요한 역량이 달라요. 학생 때는 본인만의 개성과 색을 찾아야 하지만 회사에서는 매출도 신경 써야 하고 회사의 컨셉도 신경 써야 해요. 대신 본인의 색깔을 낼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하고 일하며 경험을 쌓아야 하죠. 제일 중요한 것은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창의성을 잊어선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죠.” 그는 '코킨', '니콜 파리', 'DKNY' 등 유수한 브랜드를 거치며 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새로운 도전의 땅, 한국
뉴욕에서 자신의 꿈을 한껏 펼치던 간 동문은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수직을 위해 귀국했다. “28살, 뉴욕에서 꿈은 많았지만 벌이가 많진 않았죠. 그래서 부모님께서 한국에서 교수직을 제안했어요.” 그렇지만 귀국은 부모님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후회하지 않아요. 최연소 교수가 되는 것 역시 남들이 해보지 않은 길이잖아요. 지금도 교수로 활동함과 동시에 여러 곳에서 저를 찾아주고 있어요.” 동덕여대 의상디자인학과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3년에는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로 둥지를 옮겼고 지금까지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재직 중인 교수의 입장에서 학창 시절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인상 깊은 교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간 동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교수가 돼보니까 한 분을 꼽기가 힘드네요.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미국대학의 교수님까지 저를 가르쳐주신 여러 선생님과 교수님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어요.” 고민하던 간 동문은 “그런데 저는 무서울 때가 가끔 있어서 학생들에게 기억에 남는 교수로 꼽힐 것 같네요.”라며 재치 있는 답변을 했다. 

간 동문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족자의’라는 작품을 통해 세상에 동양미를 알렸다. 가장 신경 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간 동문은 “입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어요. 족자의는 걸어놓을 수도 있고 입을 수도 있는 심플한 원피스에요. 사대부의 글과 그림이 담긴 족자에 목을 내고 소매를 붙여 만들었어요. 이런 식으로 패션디자이너가 만든 작품은 그림처럼 보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입을 수 있어야 해요”라고 답했다. 족자의가 자신을 상징하는 작품이냐는 질문에 간 동문은 고개를 저었다. “딱 하나를 두고 제 라인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또한 족자의도 어떻게 보면 반쪽짜리 성공이죠. 이제는 족자 형태만 봐도 저를 떠올리기 때문에 단적으로는 성공이지만 기성복으로 제 시그니처를 찾지 못한 것은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 같아요.” 간 동문은 개인 브랜드를 차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개인 브랜드를 위해서는 여유를 갖고 나만의 시간을 써야 해요. 지금은 아직까지 저를 찾아주는 일을 빨리 다 해놓고 그다음에 저만을 위한 작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후에나 생각해볼 것 같아요.”

간 동문은 △서울시 공무원 유니폼 △육군 유니폼 △해양경찰 유니폼 △DDP 유니폼 등 다양한 관공서의 유니폼을 디자인했다. 그는 유니폼을 만들기 위해 크게 두 가지에 집중했다. “첫 번째는 공공성과 단체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이에요. 이 점은 모두가 신경 쓰죠. 두 번째는 입는 사람의 착용감인데 이 점을 많은 디자이너가 간과하곤 해요. 유니폼을 입고 땀 흘리며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해 원단 하나하나 신경 썼어요. 해양경찰 유니폼은 낮은 온도와 해풍에도 끄떡없도록 했고 육군 유니폼은 의장대, 군악대, 헌병 등 다양한 직무에 따라 신축성과 활동성에 신경 썼어요.” 특히 간 동문이 디자인한 해양경찰 유니폼은 만족도가 80%가 넘는 등 호평이 연이었다. “옷도 제품이에요.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입는 사람이 만족하는 옷을 만들어야 해요.”   

영감을 어디에서 얻냐는 질문에 간 동문은 자신의 휴대폰 사진첩을 보여주며 이야기했다. “누구는 자연물, 누구는 어떤 사람이라고 해요. 그런데 저는 인상 깊은 것이 있으면 뭐든 찍어요. 카페에 가서 좋은 노래가 나와도 패션쇼에서 쓰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안 해요. 항상 주변에 깨어있으려는 자세가 제일 중요하죠. 족자의 역시도 ‘서예와 패션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아트전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이렇게 성공 가도를 달려온 간 동문에게도 실패의 경험은 수없이 많았다. “한 방을 못 날린 경우가 많아요. 홍보는 잘했는데 흥행이 안 된 작품이 많았어요. 작품성 좋고 칸 영화제에도 올랐지만 흥행에 실패한 독립영화처럼요. 실패한 디자인 역시 수도 없이 많죠. 안된 작품을 이야기해주기는 너무 부끄럽네요.”

Make하지 말고 Create하라
간 동문의 롤모델은 펜디, 샤넬 등 패션계의 유명 브랜드들을 이끌어온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다. “칼은 자신만의 브랜드가 있긴 했지만 저처럼 디렉터로서 생활을 많이 했어요. 저도 지금까지 'KAN'으로서보다는 'by. KAN'으로서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왔죠. 물론 그는 국제적 스타지만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패션계에서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질문에 간 동문은 “이제 반 정도 왔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떤 의뢰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 저도 궁금해요. 그런데 앞으로는 매출 면에서도 이미지 면에서도 더 강렬한 작품을 할 거 같아요”라고 자신의 미래를 내다봤다. 간 동문은 패션디자이너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기성화된 패션을 인정하고 대중적인 옷을 해야 해요. 본인의 개성과 창의력이 뛰어나도 사람들이 입고 싶어 하는 옷을 만들어야 해요”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드렸다. “'Make'하지 말고 'Create'해야 해요. 물건을 찍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을 만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