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언니가 식재료를 조금 보내 왔다. 동생 굶고 살까 봐. 괜한 걱정이라고 타박하면서도 숨통이 트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고운 말만 하긴 왠지 민망해 너무 많다는 둥 칭얼거리는 소리를 섞어 언니에게 고맙다고 카톡을 보낸다. 고기부터 바로 냉장고에 넣고 박스 포장을 분해한다. 운송장과 테이프를 깔끔하게 뜯어내고 박스만 차곡차곡 접어 끈으로 묶어 둔다. 쓰레기는 화·목·일요일에 내놓으라고 했지. 오늘은 해당사항 없다. 4평짜리 집에 박스 쓰레기를 보관할 곳이 마땅찮다. 현관 앞에 큰 쇼핑백을 펼쳐 놓고 우선 그 안에 넣는다. 출근 시간이다. 어제 퇴근했을 때 던져놓은 가방을 그대로 들고 종로08을 타러 달려 나간다.

독립을 했다. 주4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꼬박 모은 돈과 그 일곱 배는 되는 은행 대출을 얹어 학교 앞 작은 전세방을 구했다. 청년맞춤형 전세자금대출. 학생 신분에 보험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만 하는 입장에서 기적 같은 제1금융권 저금리 대출이었다. 말이 독립이지 엄마는 가출이라고 불렀다. 계약서에 확정일자까지 받아 놓고 통보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같이 집을 보러 와줬던 우리 언니는 방에 침대가 없다는 게 내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난 원래 바닥에서도 잘 자고, 토퍼를 두 장이나 깔고 푹신하게 살 거라고 스무 번은 말해야 했다. 아직 3학년 1학기, 졸업까지도 한참 남은 데다 별다른 스펙도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덜컥 감행한 독립. 사랑하는 우리 엄마를 남겨두고 나온다는 죄책감과 돈에 대한 집착적인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나에게 집은 지옥이었으므로, 나와야만 했다.

일곱 시간 일하고 한 시간 거리를 달려 집에 돌아오면 밤 12시,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내 생활 패턴은 망한 지 오래다. 출근 전에는 여유가 없어서 자꾸 새벽 시간을 즐기다 보니 아주 악순환이다. 냉장고를 열자 엊그제 마트에서 사온 생강이 눈에 띈다. 돼지고기 생강구이나 만들어 볼까. 감자칼과 숟가락으로 흙 묻은 생강 껍질을 벗겨내고, 샛노란 알맹이를 강판에 간다. 믹서기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 집엔 그런 거 없다. 수작업 좋지 뭐. 방음도 잘 안 되던데 한밤중에 달그락거리는 게 영 미안하긴 하지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걸. 양파는 껍질을 벗겨 반쪽만 채썰고 언니가 보내준 돼지고기와 함께 팬에 올려 노릇하게 구워준다. 간 생강 2스푼, 진간장 3스푼, 맛술 2스푼, 설탕 1스푼, 식초 0.5스푼, 물엿 1스푼을 잘 섞어 넣고 졸이면 끝이다. 밀폐용기에 얼려 뒀던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그릇에 옮기고 밑반찬까지 꺼내면 꽤 그럴싸한 상차림이 된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코코아를 탄다. 한 눈에 훤히 다 보이는 집구석이지만 나름대로 살림을 갖춰 간다. 요즘 들어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천성이 나태지옥인 내겐 낯선 수식어다. 하긴 칭찬이라기보다는 안쓰러워서 하는 소리겠지. 주휴수당도 안 주는 최저시급 아르바이트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당장 다음 학기에 복학하면 하루가 얼마나 더 고될까. 그래도 일단은, 재밌다. 꿈도 없고 뭣도 없지만 내 하루를 온전히 쓰고 있다는 성취감 하나는 생겼다. 어른이란 거 생각보다 별 거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오만한 착각을 하며, 내일 또 출근해야 하니까, 이부자리에 누워 아쉽게 눈을 감는다.

양세윤(국문 17)
양세윤(국문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