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철현 기자 (gratitude@skkuw.com)

문화인과의 동행 - 김미선 지호공예 작가

김미선 지호공예 작가
김미선 지호공예 작가


한지와 양지, 폐종이 사용해
지호공예 대중화 위해 힘써

지난 17일 아침, 전라남도 담양군의 맑은 하늘 아래에 공방 금하당(琴荷堂)을 찾았다. 거문고의 선율처럼 은은하면서 묵직하게 퍼지길 바란다는 뜻의 공방에는 종이로 만들었다고 믿기 힘든 작품이 가득했다. 비주류 문화인의 행보에 대해 자신의 업(業)이라며 겸손으로 대답한 김미선 지호공예 작가의 손엔 종이로 만든 그릇이 쥐어져 있었다.

지호공예란 무엇인가.
지호공예는 한지공예의 한 분야로, 종이 지(紙)에 풀죽 호(糊) 자를 써요. 쓰고 버린 폐한지를 가지고 물에 불려 녹인 후 풀과 함께 짓이겨 종이 찰흙 형태를 만들어 사용하는 전통기법이죠. 이론으로 정립된 적이 없기에 전통 지호공예의 정의가 ‘한지에 찹쌀풀을 짓이겨 만든 그릇에 옻칠한다’로 부정확하게 알려졌어요.

지호의 ‘호’를 그릇 호가 아닌 풀죽 호로 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보물 중에 지호기법으로 제작된 종이불상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릇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물과 불상까지 만들었기에 그릇으로 한정 지을 이유가 없어요. 또 찹쌀풀이 아닌 이유는 지호공예의 유래와 맞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기그릇이 귀하고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아낙네가 길에 돌아다니던 폐한지를 하나둘 주워 만든 것이 지호공예의 시작인데, 귀한 찹쌀풀을 재료로 사용한 것은 어불성설이죠. 그래서 당시에는 자연에서 점성을 찾았는데, 바다지방에서는 민어에서 나오는 부레나 우뭇가사리를 이용했고 산간지방에서는 느릅나무 껍질이나 황촉규를 이용했어요. 마지막으로 옻칠을 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치에 맞지 않아요. 물론 옻칠도 했었지만, 서민에게 가까운 방법은 황토물·쑥물·쪽물 등 자연염료를 이용한 염색 기법이었죠.

종이를 재료로 한 예술로서 지호공예의 가치는.
현대의 지호공예는 한지만을 사용하지 않아요. 넓은 범위의 폐종이를 재활용해 친환경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있어요. 기법은 같으나 재료의 범위가 넓어졌다고 보면 돼요. 모조지나 스노우지 같이 대표적인 양지로 지호공예를 하면 작품에서 새로운 질감을 찾을 수 있어요. 한지는 얽혀 있는 조직 구조라 표면이 거친 편이에요. 반면 양지는 끈기가 없고 조직이 약해서 상대적으로 표면이 부드러워요. 이런 재료의 특성을 익히고 작품에 어울리는 종이입자의 크기와 질감을 선택해요. <매병>은 관공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반 종이로 만들었어요. 하단은 거칠게 상단은 부드러운 느낌을 표현했어요. 또 하단은 금분, 상단은 동분으로 칠해 질감의 차이를 더욱 부각했죠. 

담양군 지호공예 명인이 된 과정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전공과 무관한 직장생활을 했어요. 취미로 목조각을 배우면서 작업에 대한 로망을 품다가 20대 중반에 신문에서 여성 작가가 목조각을 하면서 혼자 산다는 기사를 보고 저도 실천할 용기를 얻었죠. 조각에서 한지공예로 옮겨온 건 봉사 목적으로 탈색 한지공예를 배우면서였어요. 근데 제가 배운 공예가 전통기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죠. 그 길로 한지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더욱이 자료가 부족한 지호공예에 관심이 생겼어요. 저라도 문헌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겼죠.

작품활동을 하다 보니 디자인적인 면에서 부족함을 느껴 39살 즈음 디자인학과로 재입학했어요. 노은희 은사님과 오석심 명장님과 교류하며 학문과 작품 활동을 병행했어요. 특히 석사 논문으로 지호공예 조형 연구를 다루면서 △종이 분류 △공예 순서 △표현 방법 등 자세한 내용을 문헌으로 남겼어요. 또 감사하게도 여러 전시회에서 저를 초대해 전시공간을 마련해 주셨고 호평을 받았어요.

담양은 청정지역으로 불려요. 이곳의 환경적인 가치를 예술로 풀어낸다면 지호공예가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담양을 지호공예의 고장으로 키워나가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이런 행보를 좋게 본 담양군에서 지역 공예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공예기술의 계승과 발전의 이유로 저를 2014년 담양군 공예명인으로 선정했죠. 

작품활동에 관해 설명해달라.
저는 작품에는 작가만의 얼굴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만든 것이 ‘한지와 한글의 만남’이에요. 석사 시절 한글 패턴을 이용한 지호공예 연구를 했는데 한글이 주는 민족성과 조형미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지호공예를 입체로 표현하든 회화로 표현하든 꼭 한글을 활용해서 작품에 넣어요.

<행복 웃음>은 삼베·종이·한지를 이용해서 동양적인 형태의 달항아리를 만든 작품이에요. 항아리 입구를 소우주로 형상화해 우주의 사람들이 서로 웃음 지으며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죠. 항아리의 동그란 입구를 중심으로 웃음과 행복이라는 한글을 배치했어요.

지호공예를 회화로 표현할 수도 있나.
알다시피 지호공예는 현재에 와서 공예품으로 많이 쓰이지 않아요. 그래서 실용성을 거두고 예술성을 높이기 위해 집중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회화적으로 풀어낸 것이 ‘지호화(畵)’에요. 2014년에 백민미술관에서 평면 작품을 주제로 내건 전시에서 제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죠. 지호화 <천년의 꿈>은 전라남도 천년의 희망 메시지를 한글 패턴에 담고 있어요. 

이런 방향에서 요즘은 지호화를 장르로서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입체보다 평면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종이죽하고 다양한 소재를 조합하는 시도를 하고 있죠.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호공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어렸을 때 탈을 만들고, 종이죽에 손가락을 뜬 적이 있을 거예요. 말이 낯설어서 그렇지 그런 미술체험이 다 지호공예예요. 미술책에 전통적인 지호공예의 개념과 더불어 폐한지 외에도 일반 폐종이를 사용해서 만들 수 있는 공예 기법이라고 명시됐더라면 지금과 같이 인식이 낮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농어촌재단·문화관광부에서 지원받아 수업을 계획할 때 ‘재활용 공예 수업’이라는 주제 안에 지호공예를 녹여요. 환경적인 공예기법으로써 지호공예를 소개하고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죠.

앞으로 계획은.
지호공예의 대중화와 보급을 위해 노력할 거예요. 지금도 자료집을 만들며 문헌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복지관의 특수아이, 소년원의 부적응 아이, 요양원의 치매 어르신들과 지호공예로 소통하며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어요. 저의 바람은 보다 넓은 공간에서 지역민과 많은 작가와 지호공예로 호흡하는 거예요.

2016년에 불일미술관에서 진행한 ‘좋은 인연입니다, 지호공예전’이 생각나요. 불자인 저는 지호로 만든 불상 역사를 더듬어서 <관세음보살상>, <석가모니불 부조 108불>, <탑 시리즈> 등을 지호공예 기법으로 만들었어요. 전시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어르신께서 수화기 너머 전시가 짧아서 아쉽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 줘서 고맙다며 용기 잃지 말고 계속해서 정진하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기분이 묘하고 이 길이 운명인가 싶은 순간이었어요. 그분처럼 이렇게 학보사를 통해서 젊은 분들이 관심을 주시니, 손때 묻은 물건에 정감이 가는 것처럼 지호공예도 언젠가 기억하고 싶은 공예로 자리 잡아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호화 '천년의 꿈'
지호화 <천년의 꿈>
한지가 아닌 양지로 제작한 '매병'
한지가 아닌 양지로 제작한 <매병> (왼쪽)
'석가모니불 부조 108불' 중 4점
<석가모니불 부조 108불> 중 4점
달항아리 '행복 웃음', 동그란 입구를 중심으로 웃음이란 한글이 보인다.사진 l 박철현 기자
달항아리 <행복 웃음>, 동그란 입구를 중심으로 웃음이란 한글이 보인다.
사진 l 박철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