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채홍 기자 (lchong2@skkuw.com)

약 2년간의 기자 생활을 책 한 권과 함께 마무리하게 됐다. 예술대학에 속해 있다는 자신감 하나만으로 지원한 문화부에서의 기자 생활은 내가 얼마나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는지를 알게 해줬다. 이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나의 편협함을 깨닫고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감히 그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사실 ‘아름다움’에는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름답다고 느껴지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면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었을 때를 생각하면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아름다움 또한 내가 이해할 준비,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만 진정으로 감상하고, 이어 창작할 수 있다.

책에서 예술가가 자신의 감정을 창작물로 옮길 때는 그때의 감정을 극복하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객관화 과정은 현실에서 빠져나와 본인 스스로 자신의 글을 예술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입장, 즉 그 감정을 충분히 돌아보고 객관화할 수 있는 정도가 됐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또한 자신의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할 때는 어떤가? 책에서는 객관적 예술가는 득기환중(得其環中), 즉 그 대상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창작물의 등장인물에 자기 자신을 대입하여 역지사지의 태도를 취해 진정으로 이해했을 때만이 수용자가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한 가지 드는 의문은 그 작가가 충분히 이해했는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자는 그에 관한 예술작품도 창작하면 안 되는가.

사실 누군가 본인에게 영상을 만들거나 기사를 쓰면서 진정으로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그것을 다뤄 완성했느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전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를 잘 모른다면 무언가를 창작해 낼 권리조차 잃어버리는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인가. 나는 감히 ‘창작’이라는 활동을 하면서 항상 특이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애썼고, 그 결과물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저자는 “예술은 반드시 질서 속에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변화에서 출발한다면 변화에 또 다른 변화를 추구하기는 어려워진다며 결국 본래는 새로움을 모색했지만, 결과는 여전히 단조롭기만 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레퍼런스, 기본의 변용에서 이뤄지는 창작이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재능이 없나’ 고민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인생의 예술화를 풍요로운 인생이라 말했다. 결국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 타인에게 전하는 말 한마디도 예술이다.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선 하나도 허투루 긋지 않고, 끊임없이 고쳐나가는 것처럼 타인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맞게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이 만드는 세상이 바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