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홍정균 (jeonggyun@skkuw.com)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에 흥미를 갖고 있다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 <컨택트>(2016)를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언어가 세계를 재현하는 방식에 따라 언어 사용자의 세계 경험 방식이 결정된다면 언어로 대상을 재현할 때 숙고해야 할 지점이 생긴다. 신조차 죽어버린 시대(니체)에 고작 언어로 대상의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틀 속에 가둬도 되느냐는 의문으로 시작하는 재현의 윤리학, 바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다.

구병모 작가의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2017)는 P라는 소설가가 정치적 올바름을 지적하는 누리꾼들에 의해 표현을 조심하며 평탄한 소설을 쓰다 결국 말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다. 두 가지 정도 짚어볼 수 있겠다. 하나는 오늘날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다. 작가(Author)는 더 이상 예전의 권위(Authority)를 지니지 못한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온전한 독자의 소유가 된다. 이 소설은 P 씨의 소설이, PC 이후 뉴미디어를 통한 교류의 장에서, PC한 독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천태만상을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그 독자들에 의해 소설의 표현 양식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격자에 짓눌려버리는 지점이다. 구 작가는 세상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아닌바, 근엄하고 올바른 표현으로만은 세상을 그려낼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은 우리나라 문단 내 표절 시비·성폭력 이후 드러난 구조적 마이너리티에 대해 독자가 작가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도리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표현 양식 너머의 정치적 올바름을 사유해보면 어떨까. 정치적 올바름이 작품에 대한 메타적 언어까지 포함하는 총체라는 상상을 한다면 소설은 표현의 임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이다. P 씨의 소설 속 인물인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국제결혼을 하고 도망친 방글라데시 신부, 미모의 청각장애인이 겪는 고통은 심화된 형태로 실제 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며 소설가는 이를 재현하지 않고는 소설을 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 작가는 소설 밖에서 “나의 소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배제하는 것에 대한) 편리한 알리바이가 되지 않기를”이라 말하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준다. 기자는 이 지점에서 구 작가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당위가 표현의 임계를 정할 때 나타나는 빈곤 속에서도 끝까지 선하고 올바름에 대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진정 소설가가 지녀야 할 자세였다.

소설은 본디 세상을 반영하는 허구다.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1830)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그런데 독자여, 소설이란 큰길가를 돌아다니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푸른 창공을 비춰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도로에 파인 수렁의 진흙을 비춰 보이기도 한다.” 아름답지 못한 수렁의 진흙을 보고 거울을 향해 추하다,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울에, P 씨에게 세상을 앗아가는 일일지 모른다. 그 후 남아 있는 것은 공허한 거울뿐. 소설은 그래야만 하는 올바른 세상과 그럴 수 없는 현실의 세상 사이의 거리에서 돌아다닐 때 그 소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