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손경원 (skw8663@skkuw.com)
사진 ㅣ 손경원 기자 skw8663@skku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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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환경재단 최열 이사장

미세먼지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환경문제는 개인의 일상과 떼놓을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일찍부터 환경의 중요성을 깨달아 40년 가까운 세월을 환경운동가로 살아온 환경재단 최열 이사장. 그를 만나 환경운동가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옥중에서 환경 책을 읽으며 환경운동의 길로
세계적 규모 환경포럼 개최가 목표

60년~7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대학 시절은 어땠는가.
박정희 군사정권 때 대학을 다녔어요. 당시 많은 대학생이 그랬듯 저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서 학생운동을 했죠. 1969년 박정희 대통령과 집권당이 부당하게 3선 개헌을 통과시켰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민주화가 될 때까지 당구, 장기, 바둑 등 즐기던 오락을 다 끊겠다고 다짐할 정도였죠.

졸업하고 나서도 선배, 동기와 함께 유신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계속했어요. 1974년 명동성당에서 구속자 석방 운동을 했는데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잡혀갔어요. 저를 비롯해 함께 구속된 여러 동료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재판거부를 했어요. 결국 재판이 이뤄지지 못해 재판장 사무실에 한 명씩 끌려가서 선고를 받았어요. 그때 6년형을 받았는데, 당시 판사 중 하나가 사법농단으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에요.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형이 확정돼 안양교도소에 갔는데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된 사람만 45명이었어요. 함께 수감된 동료와 같은 방을 쓰면서 책을 읽고 토론을 했죠. 옥중에서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이 고민했어요. 그래서 택한 게 환경운동이에요. 환경운동을 하면 제 전공인 농화학을 살리면서도 민주화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옥중에서 공해 관련 책을 250권 정도 읽었어요. 한국 책이 없어서 일본 책을 읽어야 했죠. 당시 우리나라는 환경에 대한 인식이 없었어요. ‘공해’와 ‘공예’를 헷갈릴 정도로 환경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었죠. 대부분의 동료들은 석방 이후에 열악한 노동현실을 개선하겠다며 노동운동의 길로 갔어요. 그러나 저는 앞으로 환경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감옥을 나오자마자 환경운동을 시작했나.
교도소에서 4년을 살고 나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0·26 사태가 벌어졌어요. 그 때는 세상이 어떻게든 좋아지겠지 생각했어요. 하지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또 뽑는다는 소리가 들렸어요. 비민주적인 대통령 선거를 또 하겠다는 거예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저는 동료들과 집회를 기획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돼 모든 집회는 계엄사의 허가를 받아야 했죠. 그래서 우리는 결혼식을 위장한 국민대회를 열었죠. 그게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에요. 그 사건으로 잡혀가 당시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령부 대공분실로 끌려갔어요. 가자마자 매로 막 맞았죠.

대전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와서야 환경운동을 시작했어요. 1982년 5월 1일, 혜화동 로터리에 10평짜리 사무실을 내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환경운동단체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었죠.  

환경운동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환경운동은 무엇인가.
환경이란 사람을 에워싼 모든 것을 말해요.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먹는 식품 △서 있는 토양 등 이런 거 모두가 환경이죠. △공기 △물 △식품 △토양 등의 환경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데, 이것이 오염되면 우리에게 영향을 줘요. 환경오염은 이렇게 △공기 △물 △식품 △토양을 통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오는 공해를 말해요. 이를테면 미세먼지는 공기를 매개물로 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주므로 환경오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환경운동은 이러한 환경오염을 막는 활동을 의미해요. 사실 옛날에는 사람도 적고 오염물질도 적었으므로 환경운동이 필요 없었어요. 그러나 우리나라가 산업화돼 외국의 공해산업과 사양산업이 들어오면서 환경오염이 생기게 됐죠.

기업은 이윤을 위한 집단이기에 스스로 환경오염을 개선하려 하지 않아요. 기업의 환경오염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법의 강제가 필요하죠. 환경운동은 기업이 환경오염을 일으키지 않도록 압력을 넣는 역할을 해요. 

환경운동을 시작할 당시 어려움은 없었나.
환경단체를 만들어 환경운동을 할 때도 군사정부 시절이었어요.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 아래 수출을 방해하는 것은 전부 다 반정부운동 취급을 당했죠. 그래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들자마자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찾아와 감시했어요.

당시 공단 지역에서 환경문제가 심각했어요. 특히 온산공단 주변 농촌 같은 경우 공장 화학물질로 인해 배나무에 열리는 배가 탁구공만큼 작아지고, 학교 교정의 풀도 죽어버릴 정도였어요. 초등학교에 가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니 전교생의 절반이 눈병과 피부병을 앓았어요.

지역 주민과 공장 화학물질 간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 바닷가에 있는 미역, 조개, 토양을 분석해 봤어요. △구리 △납 △카드뮴이 기준치의 10배에서 100배가 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죠. 저는 온산 지역 주민의 상황을 언론에 폭로하며 그들이 앓고 있는 질병에 ‘온산병’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환경청에서 ‘온산병이 아니다’라고 반박했어요. 국민이 불안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질병 자체가 없다고 해 버린 거죠. 온산병 발표 이후부터 환경운동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저를 가택연금하며 온산병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죠.

환경단체는 재정적인 문제도 겪을 것 같다.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성균관대에서 강연한 경험이 몇 번 있어요. 한 번은 질의응답 시간에 한 학생이 “봉급을 얼마 받냐?”고 묻더군요. 저는 “운동가니까 봉급을 받지 않고 활동비를 받는데 월 139만원 정도 된다”고 답했어요. 덧붙여 “돈은 적게 벌더라도 내가 가진 생각과 철학을 버리면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어요.

사실 환경단체와 그 안에서 일하는 환경운동가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아요. 특히 초창기에 탄압을 받으니까 일반 시민은 회원이 되는 것을 겁냈죠. 그래서 처음에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들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환경단체를 이어가기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회원이 늘어나 환경운동을 하기가 수월해요. 1993년 처음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환경운동 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을 만들었는데, 월 5000원 이상 회비를 내는 회원을 8만 8000명이나 모았어요. 지금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환경단체가 됐죠.

머리에 띠를 두르고 투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대중의 공감을 구하는 방식으로 다가가니 더 효과가 컸어요.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을 10년간 하고 그만둔 후, 지금은 ‘환경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어요, ‘서울환경영화제’나 ‘환경사진전’의 문화적 접근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향으로 환경운동을 하고 있죠.

환경운동가는 생활 속에서도 환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 같다. 
1988년에 세계환경대회 참석차 일본에 갔어요. 그곳에서 인도네시아 대표를 만났는데, 제게 젓가락을 구매하라고 했어요. 어리둥절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인도네시아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나무를 많이 잘라간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 사람이 쓰는 일회용 나무젓가락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나무가 잘려 사막화된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가방 속에 늘 젓가락을 넣고 다니면서 식당에서도 제가 가지고 온 젓가락을 썼죠. 그 당시는 대부분의 식당에서 쇠젓가락이 아닌 나무젓가락을 썼거든요.

일회용 제품 안 쓰기 운동 이외에도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운동이 많아요. 분리수거 운동도 생활 속의 환경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1995년부터 전 국민 분리수거 운동을 시작했죠. 이제는 쓰레기를 막 버리는 문화가 거의 사라졌어요. 종류별로 버려 쓰레기도 재활용이 가능해졌죠.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어린이를 위한 환경 책을 많이 썼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환경은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져야 해요. 어른이 돼서는 관성 때문에 환경에 대한 관점을 갖기가 힘들죠. 독일은 대표적인 환경 강국인데, 어릴 때 아이들에게 환경 현장을 경험하게 해요. 3살이 되면 쓰레기 처리장에 데려가고, 5살에는 재생 종이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죠. 우리나라는 그런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환경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책을 계속 쓴 거죠.

최근 우리나라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미세먼지이다. 미세먼지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현재 우리 사회는 ‘탄소사회’라고 할 수 있어요. △가스 △석탄 △석유와 같은 탄소통조림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회죠. 우리 사회는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등 산업에서 탄소를 태우며 돈을 벌고 있어요. 그런데 탄소통조림을 태우는 과정에서 여러 환경문제가 비롯돼요. 탄소를 연소하면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그 과정에서 미세먼지도 나오게 되죠. 우리나라는 국토가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7번째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국가에요. 물론 중국 탓도 있지만, 우리 자신도 미세먼지에 책임이 있는 거죠.

탄소를 태워 자연을 훼손하며 살아가는 ‘탄소사회’는 지속되기 힘들어요. 환경문제만이 문제가 아니라 석유, 천연가스는 매장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순환사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해요. 한 번 쓰고 버리는 욕망으로 가득 찬 ‘탄소사회’에서 벗어나 자연환경이 정화할 수 있는 정도만큼만 자연을 이용하는 사회가 돼야 하죠. 미세먼지 문제도 우리 사회의 거시적인 패러다임이 바뀌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요.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은 무엇인가.
한국이 중심이 돼 세계적 규모의 환경포럼을 주최하는 게 목표에요. △노자 △불교 △장자 등 동양 사상을 바탕으로 한 환경 패러다임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 ‘순환사회’에 가까워질 수 있어요. 현재 장소 마련을 위해 경복궁 옆 서촌에 땅을 사놓은 상태에요. 먼저 △한국 △중국 △일본 △인도의 환경운동가와 연대해 환경포럼을 개최할 거예요. 이후 유럽과 미국을 포함해 다보스 경제포럼에 버금가는 환경포럼을 만들고자 해요.

또 다른 꿈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캠퍼스를 만드는 거예요. 넓은 바다를 보며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느끼게 하고 싶어요. 배 안에서 토론과 교육이 이뤄지는 에코 캠퍼스를 만들어 사람들과 배움도 나누고 싶고요. 대학이나 기업과도 협약을 맺어 바다 위 캠퍼스를 5년 내로 만들 계획이에요. 저도 배를 타고 다니며 젊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남은 삶을 살고 싶어요.

​​​​​​​2002년 11월 28일 환경재단 설립 당시.ⓒ환경재단 제공
2002년 11월 28일 환경재단 설립 당시.
ⓒ환경재단 제공
서울환경영화제 포스터.ⓒ환경재단 제공
서울환경영화제 포스터.
ⓒ환경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