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국어국문학과 이영재 초빙교수

기자명 홍정균 (jeonggyun@skkuw.com)


모두가 영화를 봤던 시대의 <키노>
비평적 위기와 영화라는 장르의 위기의 구별

영화 잡지 <키노>의 필진이었던 이영재(국문) 초빙교수를 만나 그 당시 영화와 시네필에 대해 물었다. 진지한 영화 담론을 주도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키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95년 <키노>가 등장하게 된 배경
“95년은 신기한 한 해였다.” 이 교수는 1995년 9월부터 <키노>의 필진으로 잡지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1990년대 중반의 분위기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영화 열기라는 게 있었다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모두가 영화를 봤던 시대였다. 일반적으로 80년대 운동의 시대가 끝이 나고 90년대에 들어서며 문화에 대한 열정이 광범위하게 드러났던 것 같다. 미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 문화적인 장면을 해석하기 위한 여러 방법, 예를 들면 페미니즘 이론이나 퀴어 담론 등이 등장했고 그런 식의 문화주의 현상의 대표가 영화였던 것 같다.” 이때 지금의 시네마테크의 많은 부분을 구성하는 문화학교서울이라는 단체가 등장했고 1994년에는 안드레이 타르코스프키의 <향수> 같은 예술 영화를 지금의 동숭아트센터에서 배급하던 영화사 백두대간이 등장했으며 1995년에는 영화 잡지 <키노>, <씨네21>이 등장했다.

<키노>의 편집장이었던 평론가 정성일은 그 이전에 잡지 <로드쇼>에서 도씨에(Dossier)라는 코너를 통해 홍콩 느와르라는 말을 만들어가며 영화 비평을 했다. 왜 하필 홍콩 느와르였냐는 질문에 대해 이 교수는 “<로드쇼>의 독자 연령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 시절 젊은 층이 열광하고 오락거리라고 생각했던 장르에 대한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미> 식의 진지한 비평은 이후 <키노>에서 펼치게 될 담론에 선행되는 비평적 실험이었다”고 답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시네필이라 불릴 수 있는 이들이 등장했다. <키노>가 이들의 공동체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당시에 지하철에서 <키노>를 들고 있는 사람끼리 눈을 마주쳤을 때 느끼는 연대감에 대해 독자 편지가 많이 들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 잡지 「키노」의 필진이었던 이영재 교수와 「키노」 창간호
영화 잡지 「키노」의 필진이었던 이영재 교수와 「키노」 창간호.


<키노>의 폐간과 영화의 위기
그런 잡지가 왜 9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었다는 이 교수는 △현학적으로 보였다는 점 △영화를 수용하는 사회적 흐름이 바뀌었다는 점 △1990년대 <키노>의 출발 자체가 이미 늦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키노>에는 간단히 요약할 수 없는 글이 쓰였고 이는 시네필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대중들로부터는 멀어지게 되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영화의 수용 양상이 바뀌었다. 영화의 상영시간에 맞춰 종로의 단성사, 충무로의 대한극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시간과 거리의 문제는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쇼핑 도중, 데이트 도중 근처에서 영화를 간단히 관람할 수 있게 했고 이는 충분히 영화를 오락거리로 느끼게 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1990년대에는 이미 영화 물신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네필에게는 영화는 극장에서 필름으로 봐야 한다는 일종의 필름을 향한 물신주의가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오래된 방식이며 60년대의 <카이에 뒤 시네마>와 다르게 이미 비디오로 영화를 보던 90년대에 <키노>는 우리에게 늦게 도착했는지 모른다.”

이어 그는 미디어의 변천 속에서 영화의 쇠퇴는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때 영화는 뤼미에르부터 시작되는 역사로서의 필름 즉, *시네마토그래프로서의 영화다.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에서 보여주는 필름이라는 물적 조건 위에서 형성되는 영화 문화는 디지털 영상에 의해 바뀌고 이런 시대에서 영화는 다른 영상들과의 위계적 차이를 잃어버렸다.” 영화를 시네마토그래프로만 한정 짓지 않는다면 지금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같은 많은 영화나 재능 있는 작가들의 영화가 여전히 등장하고 있고 그들과 동시대를 호흡하는 수많은 관객이 있다. “영화의 쇠퇴라는 말은 일종의 과장 같다. 이를테면 문학의 위기가 한때 유행했지만, 여전히 문학이 죽지 않은 것처럼 영화의 쇠퇴는 어떤 예술 장르가 전환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위기론과 같은 것이다.” 그는 물론 비평은 항상 위기론이라면서 이런 담론들은 소중하다고 강조했고 “비평에서의 위기론을 영화라는 장르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선을 그었다. <키노>는 왜 항상 위기라는 말을 전면으로 내세웠는지 많은 사람이 물었으며 그는 새롭게 등장하는 영화와 그에 맞춰 영화를 보는 눈을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하기 위해 비평적 위기론을 열심히 구사한 것이 <키노>였다고 말한다. 그는 정성일이 쓴 <키노>의 사설에는 항상 ‘지금은 위기입니다.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진할 것입니다’라는 말이 변용돼 들어갔다고 회상했다.

오늘날 <키노>와 시네필에 대해 말한다는 것
처음으로 한국에 등장했던 시네필은 1970년대 후반에 독일 문화원이나 프랑스 문화원을 드나들던 사람들이었다. 이 교수는 “대표적으로 프랑스 문화원에서 장 뤽 고다르의 영화 <기관총부대>를 본 정성일 평론가가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영화시장은 폐쇄적이었다. 79년 한국에 수입된 외국 영화는 29편밖에 없었고 이런 시기에 새로운 영화의 창구는 문화원이었다”고 답했다. 몇몇 예외가 있지만 최소한 1988년 이후 한국의 뉴웨이브인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감독이 동시에 도착하기 이전 한국 영화는 담론의 위계질서에서 제일 아래에 위치한 것으로 인식됐다며 시네필들의 등장 이후 한국 영화의 제작 주체가 변했고 한국 영화 산업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매번 변하는 시장과 미학의 문제 안에서 영화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의 소중함을 말한다. “내가 시네필이라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영화는 영화를 많이 볼수록 잘 보인다. 예를 들어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감독 션 베이커가 현대의 테크놀로지로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네오리얼리즘을 경유하는 방법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오늘날 시네필의 공동체였던 <키노>를 말하는 것은 영화를 영화로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기회가 될 것이다.”

*시네마토그래프=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영사기 겸 촬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