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리는 세상 - 영화 '유전'

기자명 우연수 (daleksupreme@naver.com)

 

지난 6월 개봉한 공포영화 <유전>은 가족을 잃고 기이한 현상에 휘말리는 애니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애니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까지 교통사고로 떠나보낸다.
게다가 그 사고는 아들이 낸 것이었다. 사고 현장을 직접 목격한 애니와 그의 가족은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가족과의 갈등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애니는 점점 피폐해지고 끝내 이상행동까지 보인다.
이에 본지에서는 우리 학교 홍진표(의학) 교수의 도움을 받아 애니의 행동을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살펴봤다.

사별 후 복합사별장애 양상 보여
몽유병, 유전적 취약성 암시해

트라우마가 낳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영화 <유전>에서 애니는 어머니와 딸의 죽음을 연달아 경험한 데다 잔인하게 훼손된 딸의 시신까지 목격했다. 애니는 이 같은 외상에 대해 강한 공포 반응과 슬픔을 나타낸다. 홍 교수는 애니의 행동 변화를 트라우마로 인해 시작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설명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자연재해나 폭력, 이별과 같은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 나타내는 심리적인 반응이다. 딸의 사고 현장과 유사한 악몽을 꾼다든가 가족 식사 자리에서 아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는 장면이 이에 해당한다. 홍 교수는 “소중한 대상의 상실을 공포 속에서 체험한 후 악몽을 통해 재체험하고 상실과 관련된 부정적인 정서를 경험한다. 또 지속적으로 자신과 아들을 비난하거나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특징적인 증상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특히 주술로 딸의 영혼을 불러낼 수 있다고 믿어 의식을 치르다가 빙의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인 환각이나 해리 증상에 해당한다. 해리 증상은 심한 스트레스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자아가 분열되는 증상이다.

미니어처 조형사인 애니는 딸의 잔인한 사고 현장을 미니어처로 재현한다. 아들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죽은 딸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홍 교수는 “반복적으로 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거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을 강박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복합사별장애 양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지속성 복합사별장애는 병적인 애도 반응으로서, DSM-5에서는 “친밀한 사람과 사별한 후 12개월 이상, 자녀의 경우 6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다양한 사별 증상을 나타내는 경우”를 기준으로 제시한다. 한편 애니는 자조 모임에서 생전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털어놓는다. 사고 이후에는 남편의 신뢰를 잃었고, 아들과는 사이가 어색해 자주 다퉜다. 또 애니는 영화 내내 전시 마감에 쫓기는데, 작업 상황을 묻는 에이전시의 전화에 작품을 모두 부숴버릴 정도로 부담감에 시달린다. 홍 교수는 이를 두고 “가족과 적절하게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고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한 상황과 직업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된 상황은 증상을 악화하는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영화 '유전'
영화 '유전'

<유전> 속 유전
영화의 제목에서 보듯 애니의 행동이 가족력에서 온다는 암시가 있다. 영화 초반 애니의 가족이 모두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버지는 우울증 △어머니는 해리성 정체 장애 △오빠는 조현병을 앓았다. 이 중 우울증은 유전될 가능성이 높은 질환이다. 미국 뉴욕주립 정신의학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부모가 우울증일 때 자녀가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2배 크고 약물 중독이나 자살 시도 위험도 함께 커진다. 특히 조현병은 유전적인 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 뇌 질환이다. 우리 학교 홍경수(의학) 교수는 “광범위한 역학연구들로 미뤄 봤을 때 조현병의 발병 원인 중 70%가 유전이라는 것은 상당히 확실하다”고 보충했다.

물론 조현병은 일반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유전적으로 연관되는 질환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족적인 조건이 정신질환의 유전적 취약성을 높이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홍진표 교수는 “똑같은 사건에 노출되더라도 과거력이나 가족력이 있는 경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진행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애니가 딸이 죽기 전부터 몽유병과 같은 수면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발생에 취약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홍진표 교수는 “생각과 기분을 조절하는 유전자 및 신경회로가 유전되고 있으며, 큰 트라우마를 경험할 경우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발전될 소인을 원래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