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지웅배 기자 (sedation123@naver.com)


일본 물들인 서양 제국주의
예술에서 일본 영향 묻어나

 

전염된 오리엔탈리즘, 제국주의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서구화를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이웃나라 일본에 의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서유럽의 오리엔탈리즘과 일본의 조선학은 지배와 통치를 위한 지식체계로서 형식과 구조 상 유사성을 지닌다. 일본 현대 학문의 기초를 쌓았다고 평가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 정체(停滯)의 원인을 타자화에서 찾았다. 유럽은 문명과 진보를 뜻하는 반면 아시아는 미개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식민지배를 통해 정체된 조선을 근대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통치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식민사관이라는 정책적·조직적으로 조작된 역사관을 생산했다. 일본 국제정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니토베 이나조는 “식민은 문명의 전파”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독교인이면서 반전(反戰)·반군국주의자였던 야나이하라 다다오 역시 식민의 문명화작용을 확신했다.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는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에서 “일본은 조선을 극단적으로 폄하했던 반면 정체된 아시아 중 자국은 예외로 봤다. 동시에 일본은 서양이 동양에 대해 그랬듯 조선을 관능적인 대상으로 묘사해 자국의 방탕한 무리들을 보내는 장소나 도덕적인 본토에서는 불가능한 성적 체험의 유발지로 여겼다”고 말한다.

현대에 이르러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해 박 교수는 “근대화·민주화 같은 우리 현대 역사의 지향점은 사실 오리엔탈리즘의 표현이다. 여기서 일본은 오리엔탈리즘의 매개 변수”라고 설명한다. 일본은 조선의 상황에 개의치 않고 서양의 근대화를 그대로 차용해 군사와 정치 및 산업제도로 전개했다는 뜻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그는 “한국의 근대화·민주화가 본질적인 인권 증진과는 무관하게 권력구조를 재배치하고 자본 투자를 합리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한다. 이는 근대화·민주화의 표본인 미국중심의 열강에 대한 편애로 이어지며 비 서구를 야만시하는 풍조가 만연해졌고, 이 풍조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구조를 결정해왔다는 의미다.    
 
정치적 목적 하에 조선 미술을 이해한 세키노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은 미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근대적인 방법으로 조선 미술이 연구되기 시작했는데, 초기 연구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 지식인에 의해 이뤄졌다. 상명대 미술학과 이인범 교수는 한국문화와 오리엔탈리즘에서 “연구를 행한 대표적인 인물로 세키노 타다시와 야나기 무네요시를 꼽을 수 있다”고 말한다. 1904년 도쿄국제대의 교수인 세키노 타다시는 조선 전역을 둘러보며 본격적으로 유적 수사에 착수했고 그 결과물로 한국건물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 세키노는 “조선 공예나 산업은 국민의 기질 때문에 진전될 수 없으며, 건축은 헛되게 수식하는 것에 빠져 섬약하고 왜소하며 독창적인 색채가 결핍됐다”고 말했다. 이는 연구가 진행된 시기와 관련이 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아시아의 국가들을 서구 열강의 지배로부터 지켜낸다는 명분 아래에 조선 지배에 대한 야망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층 더 체계화된 연구 성과는 1930년대 초에 발간된 세키노의 조선미술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미술은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러 그 발달이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다소 쇠퇴의 조짐을 보이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층 쇠퇴를 거듭했다.” 그는 조선 미술의 특징이 열악한 조건에 구속돼 비자주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한 마디로 그의 입장은 일본 식민주의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것으로 요약된다”며 “덧붙여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 식민지배에 힘입어 조선의 진보 가능성을 기대했다”고 말한다. 세키노는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에 따른 결과 훗날 전문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조진사연문호.
야나기가 두 번째로 조선에 방문 당시, 
보고 아름다움에 감탄한 작품
조선 미술을 근대적 방법으로 연구한
세키노 타다시
조선 미술을 근대적 방법으로 연구한
야나기 무네요시

 

슬픔을 덧씌워 아름다움을 엿본 야나기
사상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에 관한 연구에서 세키노와 다소 입장 차이를 보인다. 그는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신문에 기고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참여했던 세키노와는 다르게 조선 미술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한 달여간의 조선 여행을 다니면서 미술을 관찰했고 이 경험을 토대로 ‘민중적 공예’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민예론’을 적립했다. 그는 조선 문화와 예술의 미적 특징을 규명하고 나아가 삶의 이해와 해석에도 초점을 맞췄다. 그는 문화재부터 일상의 물건까지 온갖 조형물에서 가늘고 긴 선적 요소들이 쓸쓸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비애미’라는 사상을 제창했다. 또한 그는 ‘백색의 미’라는 특징을 규정하며 색채의 부재에 주목했다. 이 교수는 “비애미는 그가 3·1운동 탄압에서 받은 충격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조선 민족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이해가 가능하며 조선 민족이라는 ‘타자’를 식민 지배국 지식인으로서 낭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스트의 태도와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야나기는 조선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문화재 보존에도 도움을 줬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존재하지만, 그의 연구는 너무 개인적이고 선입견에 빠져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었다. 야나기의 연구에 대해 한국 최초 여성 화가 나혜석은 흰색 복식을 개량하는 운동을 통해 반대했고, 철학자 박종홍은 ‘비애미’론에 대해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기상과 활달을 근거 삼아 “근대인의 외관상 선입견에 지배된 자”라고 비판했다. 또한 미술 사학가 고유섭은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에서 동아시아 삼국의 예술을 형·선·색으로 설명했던 야나기의 해석이 국민적·국가적 특징으로 규정되기에는 너무나 개인적 감상임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교화의 잔재 다시금 어둠을 드리우다
일본은 종교를 도구로 조선인을 세뇌와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도(神道)는 일본민족 정신생활에 기본이 되는 일본 고유의 사상으로서, 천황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일본의 국수적 토착종교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연구위원은 “일본의 신도는 천황 중심주의와 이를 옹호하기 위한 힘의 논리로 조직됐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이용됐다”고 설명한다. 이후 일본은 조선인을 교화의 대상으로 여겨 신도의 수용을 강요했다. 1930년대 일본은 신사 중심의 이른바 황국신민화를 위한 정신개조운동을 강화했고 일반인에 대해서도 신사참배와 신도적 행사를 적극 장려했다. 1면 1신사 정책을 세워 산간벽지의 면 단위에까지 신사를 세우게 하고 일반 민중에게도 참배를 강요했다. 신사는 참배와 제사의식 등을 통해서 식민지 교육기관과 함께 천황제 이데올로기 전파의 거점이 됐다. 물론 신사는 우리 민족 원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신사들은 해방되자마자 대부분 민간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허나 현재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외래 신흥종교는 일본에서 들어온 것들이 많으며 다시금 떠오르는 추세”다. 천리교를 비롯한 신도계, 일련종을 비롯한 불교계 등 그 종단만도 30여개에 이르고 신도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 같은 종교의 경우 대부분 일본 민족의 국수주의적 우월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김 연구위원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