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역학, 미술 영상 등 곳곳에 쓰여
과학과 예술 간 일상 속 자연스러운 협업이 바람직해

기자명 이채홍 (dlcoghd231@gmail.com)
김윤철 작가의 작품 'VERTIGO(2014)'하나의 질료가 추락할 때 다른 하나의 질료는 부상하는 것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김윤철 작가의 작품 'VERTIGO(2014)'
하나의 질료가 추락할 때 다른 하나의 질료는 부상하는 것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예술’이란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는 화가의 일은 있는 그대로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에서 우주적 진리를 정제하는 것이라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데 과학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합리적 추론에 등을 돌리고 자기 판단만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속이는 지름길”이라고 답했다. 애초에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과 과학은 전혀 다른 개념을 말하는 것 같다. 이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의 관계인 것일까.

고대의 예술 혹은 과학
고대에는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의 엄격한 구분이 없었다. 고대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수학 공식인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과 같은 미술 대작을 남긴 화가이면서 인체 비례도, 비행기 설계도와 같은 업적을 남긴 과학자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왜 예술과 과학이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여겨질까. 우리 학교 신소재공학부 원병묵 교수는 “서양 지식의 발전 과정에서 서로 지식이 너무 방대해지고 전문성을 따라가지 못해 분리됐다고 생각한다”며 풍부해진 지식을 구분해야 하다 보니 서로 멀어졌다고 말했다. 특히 현대에 예술은 감각에 기반한 것, 과학은 사실에 기반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둘을 반대의 예시로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유체역학이 물감과 같은 유체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예술 분야와는 관련이 있지 않냐는 질문에 원 교수는 “작가의 표현은 물질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고 작가는 사물의 물성을 이해하고 그 본질을 자기만의 화법으로 표현한다”며 작품의 재료로 사용되는 유체와 예술작품 간의 상관관계를 언급했다. 4대 역학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한 유체역학, 그리고 이와 만날 듯 만날 수 없어 보이는 예술, 둘의 교집합을 탐구해보자.

유체의 순간을 포착하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작품이다. 단순히 고흐의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를 묘사했다고 평가받던 이 그림에서 소용돌이는 난류 형태의 축적 법칙에 정확히 들어맞는 형태를 띠고 있다. 지난 2006년 멕시코국립대의 물리학자 호세 루이스 아라곤 박사팀이 고흐의 후기 그림을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그림 속 소용돌이는 난류의 움직임과 같았다. 두 지점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두 지점의 밝기가 같을 확률이 감소했으며 특히 이 확률은 두 지점 사이 거리의 거듭제곱에 비례해 줄어들었다. 이것은 난류를 다루는 유체역학의 대표적인 법칙인 ‘콜모고로프 척도’에 해당된다. 또한 유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졌던 예술가들은 물의 흐름을 포착한 사진, 미세 물질들로 만들어낸 패턴 등 움직이는 물질의 순간을 건져내 작품을 만들었다. 유체 안으로 페인트를 주입해 흐르는 모습을 관찰하거나 드라이아이스 등의 재료를 사용해 짧은 시간에 여러 유체가 만나 형성하는 화려한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다. 이러한 사진은 광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우유 광고의 왕관 모양 사진이 대표적이다. 구체를 액체 위에 떨어뜨릴 때, 액체 표면에서 일어나는 ‘튀김 현상’을 이용해 신선한 우유의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유체를 이용한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들
유체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에서 나아가 유체를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도 많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드미트리와 애밸리나 듀오는 실제로 과학자들과 협업해 유체역학, 양자역학 등의 공부를 하고 거기서 받은 영감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한다. 주로 액체를 사용한 작품을 만드는데, 최근 작품으로 ‘ER=EPR’이 있다. 이 작품은 물의 특성을 이용해 ‘얽힌 입자들이 웜홀에 의해 연결돼 있다’는 물리학의 추측을 나타낸 작품이다. 우리나라의 김윤철 작가도 물질의 특징을 이용한 유체 변화에 초점을 맞춰 ‘메타물질’이라 불리는 새로운 물질을 만들고 그 특성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든다. 그가 창작한 은색의 물질도 “메탈릭하게 코팅된 물질을 사용하고 싶어 과학적 지식을 찾아보고 실험한 끝에 탄생한 것”이라 소개했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장르도 유체역학과 떼 놓을 수 없다. 그는 공업용 페인트를 막대로 찍어 위에서 떨어뜨리면서 몸을 움직여 페인팅했다. 이때 막대 끝에서 물감이 떨어지는 것을 물리적 관점에서 ‘코일링’으로 볼 수 있다. 코일링은 점성이 높은 액체가 빠르게 움직일 때는 직선으로 떨어지지만 움직이는 평면에 천천히 부으면 구겨지거나 로프 형상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원 교수는 “꿀을 떨어뜨릴 때 바닥에 꿀의 줄기가 돌돌 말리는 현상을 예로 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놀라운 것은 잭슨 폴록이 활동했던 1950년대 이후에 코일링 현상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는 사실이다. 원 교수는 “잭슨 폴록은 공업용 페인트가 가진 유체의 특성을 몸으로 체득한 것”이라며 “그의 작품은 물질의 특성을 이해하고 조절해 자연과 닮은 *프랙털 패턴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 속에서의 유체역학
애니메이션, 게임 등과 같은 영상을 만드는 데에도 유체역학 개념이 접목돼있다. 이 분야에서 유체는 ‘고체보다 형상이 일정하지 않아 변형이 쉽고 자유로이 흐를 수 있는 액체와 기체 그리고 플라스마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를 구현하는 효과를 ‘유체 효과’로 명명하는데 주로 CG(컴퓨터 그래픽)로 유체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동서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부 황민식 교수는 “유체 효과를 만드는 모든 프로그램은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물론 유체에 대한 기본적인 과학적 지식은 필요하지만 이미 증명된 수식을 이용해 유체 효과를 만든다”고 말했다. 툴을 활용해 유체효과를 만들기는 하지만 이를 만드는 사람이 유체의 점성, 압축성 등의 특징을 이해하고 여러 옵션 중에서 어떤 것을 조절하는지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사실적 표현은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며 “그보다 지금은 작업의 효율을 높일 수 있게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연구가 주된 내용”이라는 말을 덧붙여 과학적 지식을 넘어서 일의 효율성을 증대할 수 있는 연구가 진행 중임을 알렸다.

앞으로 나아갈 길
과학과 예술을 떨어뜨려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럼 둘은 어떤 방향으로 화합해 나가야 할까. 원 교수는 “과학자나 예술가나 이론이나 테크닉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 숙련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며 “특정한 목적 없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서로 영감을 받고 그게 각 분야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윤철 작가도 “합작도 중요하지만, 프로젝트처럼 일회성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서로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공존하면서 이를 각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