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가영 기자 (lvlygy@skkuw.com)

‘기(氣)’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같은 개념은 오늘날 비과학적인, 혹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동양의 철학과 문화 안에서 발전돼 왔으며, 저마다의 논리를 가지고 한의학의 기반이 됐다.

한의학 원리, 철학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서양의학과의 차별점으로 현대적 가치 조명

 

오행과 장기의 관계도.
일러스트 l 유은진 기자

기(氣)로 통하는 한의학
한의학의 원리는 △기 △음양 △오행의 이론에 기반을 둔다. 기는 기본적으로 생명현상의 여러 특징이 발휘되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이해된다. 한의학에서는 이러한 기를 인체의 생리·병리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 틀로 채택한다. 기의 작용에 따라 각종 병리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질병을 유발하는 기의 작용에는 대표적으로 기허와 기기실조가 있다. 기허는 기 자체가 약화된 것을 의미하고, 기기실조는 기의 균형이 무너진 것을 의미한다. 이때 기의 상태를 규명하는 데 바탕이 되는 것이 음양론이다.

음양은 기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을 설명하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인체 자체와 인체의 각종 변화를 설명하는 데 적용된다. 음양론에서 신체의 외(外)는 양이고 내(內)는 음이며 상부와 하부는 각각 양, 음에 속한다. 또한, 생리 기능에서 발열, 혈압상승, 빠른 맥박은 양에 속하며, 오한, 혈압강하, 느린 맥박은 음에 속한다. 인체는 음과 양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이뤄질 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이러한 음양의 상대적인 평형, 즉 조화가 깨지면 병리 현상이 발생한다고 본다. 음양의 조화가 깨지는 원인에는 선천적인 소질의 허약,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 내상, 외감 등이 있다. 한의학은 질병이 이러한 내재적인 원인과 외래적인 원인이 합세한 까닭에 일어난다고 보고, 양과 음을 조화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둔다.

한편 한의학에서의 오행은 치료에 적용되는 이론이다. 음양이 변화하는 상대적인 개념인 데 반해, 오행은 장기의 계통을 분류해주는 보다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오행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가지 행으로 이뤄져 있으며, 각 장기는 하나의 행에 속하게 된다. 오행은 행과 행이 서로 도와주는 관계인 상생과 서로 경쟁하는 관계인 상극의 원리를 활용하여 내장의 상호자생과 상호제약의 관계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목’이라는 행의 특징적 현상을 나타내는 병증이 발생할 경우, 목의 행에 속하는 장기인 간의 건강이 병증의 원인이 된다. 이때 목의 성질이 과할 경우 상극관계에 있는 ‘금’이나 ‘토’를, 약할 경우 상생 관계에 있는 ‘화’나 ‘수’를 활성화시킴으로써 병증의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 한의학의 설명이다. 요컨대 한의학에서는 오행 이론을 토대로 장기 사이의 관계를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치료를 구상하고 실시하게 된다.

민족 고유의 의학으로 자리 잡다
한의학은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독자적인 발전은 조선 시대에 이뤄졌다. 대표적인 한의학 저서인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동의보감 △침구경험방을 토대로 조선 한의학의 발전과정과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향약집성방』은 조선 시대에 독자적인 의약학 수립을 위한 연구가 이뤄지면서 편찬됐다.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쳐 전해 오는 국내의 모든 의약 방서가 『향약집성방』에 집대성됐다. 『향약집성방』은 당시 궁중이나 민간에서 널리 쓰이던 경험 처방과 침술법이 실려 있는, 우리나라 의약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현존 의서다. 이후 세종은 당대 모든 의학지식을 한 데 모아 우리나라 의학 발달의 기틀로 삼고자 국내뿐 아니라 중국, 인도의 의서까지 포함한 의방유취를 편찬하도록 했다. 『의방유취』는 당시 통용되던 의약서의 모든 이론과 약방들을 병증별로 분류해 독자적 체계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의 편찬으로 독자적인 의학연구의 기틀이 잡히자 이를 더 발전시켜 한의학을 민족 의학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이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한다. 『동의보감』의 목적은 한민족에 적합한 의술을 연구, 개발하는 데 있었다. 조선의 실정에 맞게 질병을 분류해 이에 따른 실용 처방들을 담고, 백성들이 응용할 수 있는 침술까지 포함시켰다. 특히 조선의 산야에서 나는 약재의 채취, 제약법을 많이 담고 있으며, 약재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 백성들이 이용하기 편하도록 했다. 『동의보감』은 조선의 민족 의학을 수립했다는 데 있어 그 의미가 크다. 한편 『침구경험방』은 당시 뛰어난 침술로 인정받던 허임이 침구학에 대해 자세히 다룬 책이다. 허임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연구한 *보사법과 같은 새로운 침술이 이 책에 소개돼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의학은 조선의 자체적인 의학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됐다. 그러나 조선 말기부터는 일본의 말살정책과 서양의학의 유입으로 한의학은 점차 쇠퇴하게 됐다.

서양의학과의 차별점을 밝히다
서양의학의 등장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서양의학과 차별화되는 한의학의 △현상 중심 △종합적 치료 △개체성 중시의 특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한의학의 가장 큰 특징은 한의학이 생명 현상학으로서, 신체에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해 그것을 바탕으로 질병을 판단하고 치료 방법을 강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한의학에 의하면 병의 원인은 증상으로 드러나며, 그런 의미에서 증상을 통해 원인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통해 몸 내부의 한의학적 논리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한의학은 서양의학에서 중시되는 해부나 수술 없이 병증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것을 지향한다. 또한, 한의학은 종합적 치료를 지향한다. 국소적인 질환도 그 원인을 국소적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전신적으로 그 질병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조건이 있는 것으로 보고 전신의 부조리한 상태를 개선해 줌으로써 병증이 전반적으로 개선되게 하는 치료 방법을 취한다.

마지막으로, 한의학에서는 개체성이 매우 중시된다. 일반화된 치료법보다, 개개인의 체질을 중시하여 그 특성에 맞도록 치료하는 것을 선호한다. 같은 질병이라고 해도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한 환자의 체질에 따라 다른 약재를 사용한다. 이러한 특성은 소비자의 요구에 딱 들어맞는 ‘커스터마이징’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요구와 맞물려 현대사회에서 한의학적 치료법이 각광받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수성을 기반으로 최근 한의학이 서구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구체적으로 연계하여 연구함으로써 상호보완하는 새로운 학문 틀을 제시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보사법=부족한 곳은 보충하고 남는 것은 제거하는 진단 및 치료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