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정재욱 기자 (wodnr1725@skkuw.com)
지난달 25일 ‘연극·뮤지컬관객 #WITH_YOU 집회’가 대학로 마로니에에서 열렸고 공연계 성폭력 OUT을 외쳤다.사진 | 한대호 기자 hdh2785@
지난달 25일 ‘연극·뮤지컬관객 #WITH_YOU 집회’가 대학로 마로니에에서 열렸고 공연계 성폭력 OUT을 외쳤다.
사진 | 한대호 기자 hdh2785@

미투운동으로 조직 내 성폭력 고발 활발
미투운동, 피해자 심리에 긍정적 효과 가져와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 추문 사건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는 미투운동이 시작됐다.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전 세계를 뒤흔든 미투운동은 태평양 건너 한국에도 이어졌다. 지난 1월 29일 창원지검 통영지청 소속인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를 신호탄으로 미투운동은 정계와 언론계, 대학사회 등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현재 미투운동은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뜨겁게 진행 중이다. 2년 전 문단에서는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온라인으로 문인과 평론가에 대한 젊은 문인과 작가 지망생들의 폭로가 있었다. 당시에는 지목받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외면받았다. 하지만 미투운동을 통해 최영미 시인이 다시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알리면서 파장이 예고됐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감독 역시 가해 사실이 드러나, 지난달 19일 사과와 함께 극단 연희단거리패·밀양연극촌·30스튜디오의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한국 극작가협회에서도 제명됐다.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이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이들의 대응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독점적 권력 거머쥐고 자라난 괴물들
이번 미투운동을 통해 드러난 조직 내 성폭력의 근본적 배경에는 위계질서 내 불균형한 권력 구조가 있다. 명백한 개인의 범죄이기 때문에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함과 동시에 구조적 폐단도 함께 지적을 받은 것이다.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윤김지영 교수는 “이번 연극계 성폭력 사태는 특정 권위자에 대해 인적, 경제적, 사회적 자원들이 독점되는 구조에서 실질적인 견제 장치가 부재함을 보인 것”이라며 “피해자들의 순응과 침묵을 강요하는 도제식 제작 환경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여성 억압적 구조가 묵인된다”고 전했다. 고은 시인의 경우 오래전부터 문단 내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을 지속해왔으나 누구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 역시 이와 관련 있다. 황해문화 주간인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고 시인의 한국문학과 문단에 대한 공헌도와 원로시인으로서의 권위가 함께 작용했다”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문단 권력 관계는 물론 친소관계 등의 네트워크가 각종 청탁이나 평론에 영향을 미쳐왔다”고 전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16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성희롱 피해 경험을 조사한 결과 가해자는 직장상사 ·고용주(65.4%)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성희롱이 권력 관계가 수반된 폭력인 것으로 풀이된다. 윤김지영 교수는 “성별에 따라 사회적 희소자원이 차등 분배된다는 점에서 권력형 성폭력의 물질적 조건은 성 계급이 근본”이라고 밝혔다.
  
남성 중심적 문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다
일련의 폭로에 대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이상화 교수는 특정 집단 혹은 개인이 아닌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 성향을 그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는 “무엇을 폭력으로 명명, 인식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의사결정 주체에 의해 해석이 이뤄지기 때문에 한국 사회 주류인 남성을 기준으로 피해자 여성은 배제, 소외되면서 문제의 본질은 왜곡된다”고 전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가부장적 문화와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성폭력 문제가 만연하게 됐다. 윤김지영 교수는 “상명하복식 문화는 하부 계급일 때 복종만을 강요하고 상부 계급일 때는 자신이 당한 부조리를 약자에게 재생산합니다. 그리고 가부장적 문화는 공적, 사적 영역에서 일방적으로 규정된 남성특권구조의 상층부를 차지하기 위해 남성적 가치를 내면화시킨다”며 “서열을 확인하고 폭력을 놀이화하는 구조 속에 조직 내 성폭력이 일어난다”고 밝혔다. 남성 중심적 구조 속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사회의 성차별에 둔감하다. 지난달 발표된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발생원인 중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 문화가 중요한 요인이라고 답변한 남성 비율은 41.2%, 여성 비율 57.2%로 다른 요인보다 차이가 두드러졌다. 김 교수는 “다른 사회 영역과 마찬가지로 문단 내 가부장 문화는 엄연히 존재한다”며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라는 문인이 젠더문제에 보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2차 가해,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공론화하더라도 2, 3차 피해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들은 조직 내 가해자의 명예훼손과 같은 법적 대응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 윤김지영 교수는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켜 사실에 입각한 피해자의 폭로를 막는 기제로 소환돼 미투운동의 토양을 황폐화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조직 내부에서도 부정적 이미지를 우려해 성 관련 이슈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경계한다. 이에 따라 조직은 피해자에 인사 불이익 조치 혹은 법적 조치를 가한다. 사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CBS 강민주 전 PD는 “사내 성희롱 문제 제기 후 사측과 가해자가 씌우는 프레임은 전형적”이라며 “꽃뱀 프레임 및 업무 성과 미흡에 따른 불만 제기 후 성희롱과 무관한 인사 징계 및 해고 조치가 가해졌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같은 회사 측의 불이익 조치를 법정에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윤김지영 교수는 “가해자와 동조자들이 피해자에 대한 불리한 진술을 증거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인사 점수 등은 얼마든지 내부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대검찰청 공식 보고서에 의하면 성폭력 허위신고는 0.49%에 불과하지만, 피해자를 꽃뱀으로 우선 상정하고 보는 통념인 꽃뱀론은 피해여성을 침묵시키는 지배방식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피해 사실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거나 가해자의 진술에 무게를 싣는 가해자 중심 서사는 문제를 제기한 여성을 ‘꽃뱀’으로 낙인찍어 2차 가해를 유발한다. 
  
최소한의 보호막 최대한의 아우성 
한 발 내딛기조차 힘든 낭떠러지 앞에서 이제야 피해자를 위한 밧줄이 주어지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미투운동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사회 전반적인 공감이 형성됐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에 따르면 모든 지역, 계층, 성별에서 미투운동을 긍정했고 전체 응답자 74%가 지지했다. 성폭력 폭로 운동은 있었지만 고위직인 검찰조직으로부터 시작된 미투운동은 다양한 영역의 피해자들이 동참하고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이 교수는 “이전까지 성폭력 담론은 피해자 책임을 강조하는 정조에 관한 죄를 중심으로 피해자가 침묵하는 구조가 형성됐다”며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는 사회적 권력을 가진 여성도 이 구조 앞에서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다는 점은 피해자들로 하여금 배짱을 튕길 수 있는 수위를 높인 사회적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번 미투운동에서 SNS는 피해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윤김지영 교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외침은 피해자가 예측할 수 없는 모든 반응에 노출되는 만큼 위험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SNS는 폭로 단계에서 피해자의 익명성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어 2차 가해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폭로는 폐쇄적 조직문화에서 용인되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가 침묵의 카르텔에 의해 소음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최후의 변론이자 최초의 용기라 할 수 있다”고 미투운동에서 SNS의 역할을 언급했다. 미투운동은 피해자의 심리 회복에도 도움을 준다. 신승호 정신건강의학의 전문의에 따르면 “이번 미투운동은 건강한 자기주장이자 내적으로 억압된 집단 무의식의 건강한 발현”이라며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고통을 극복하는 데 사회적 차원의 격려와 공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폭로를 넘어 반성과 성찰의 길로
실제로 사회에 만연한 조직 내 성폭력을 구성원들이 인식하면서 자정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성폭력 사태에 대처하고자 하는 연극인들은 ‘연극인 모임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을 결성하고 신고 접수 및 피해자 법률자문, 상담 등 본격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 극장과 극단, 제작사 역시 자체적인 정화에 나서고 있다. 연극인뿐만 아니라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연극·뮤지컬관객 관객들은 온라인상을 벗어나 대학로에서 자발적인 집회를 하고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 및 재발방지대책수립을 요구했다. 연극·뮤지컬관객 #WITH_YOU 집회에 참여한 24살 A 씨는 “중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공연이 여성을 성폭력 하면서 만든 것이라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참여했다”며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미투운동을 시작하는 분들이 집회를 보고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은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 미투운동 긴급토론회, 27일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문화예술계의 성폭력 실태와 2016년 국내에서 시작된 성폭력 폭로 운동을 다루는 포럼이 열려 여성단체도 미투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다. 이 교수는 “조직 내 성폭력 문제로 조직문화 구성을 변화시키기 위한 예방 교육이 형식적 내용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교육 기간과 방식, 내용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며 “조직을 이끌며 의사결정의 권한이 있는 사람이 교육에 필히 참석하고 조직 내부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영미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