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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유은진 기자 qwertys@
성대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유교경전이 언제, 어떻게 한반도에 전래되어 학습되고, 전파되었는지에 대하여 궁금증을 지녔을 것이다. 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소수림왕 2년 6월조에 “태학을 설립하고 자제를 교육하였다”라고 한 기록을 근거로 유교문화의 전래 시기를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소급시킴이 일반적이다. 우리의 사서(史書)에 기록된 것인 만큼 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나, 다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실체적 증거가 있느냐가 문제로 지적될 수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에 발굴된 목간(木簡)ㆍ금석문(金石文) 등의 1차 사료들을 중심으로 고대한국의 유교문화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찾을 수 있겠다.

한반도에서 유교경전의 전래를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1990년대 초 평양의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논어』 죽간(竹簡)을 들 수 있다. 『논어』의 선진ㆍ안연편(先進ㆍ顔淵篇)의 일부가 쓰여져 있는 이 죽간은 기원전 45년 경 한(漢)나라에서 제작되어 낙랑군으로 유입된 것으로서 고대한국의 유교문화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려주는 유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낙랑군에 인접한 고구려는 한사군을 통한 한나라의 문화를 수용하기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위에서 말한 태학에서의 유교경전 교육이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로는 2012년에 발견된 『집안(集安) 고구려비』(427?)에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미고(彌高: 매우 높다)”라는 표현이 등장함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위진남북조대의 역사서들(『남제서』ㆍ『주서』ㆍ『북사』)에서 고구려에 5경(『시경』ㆍ『서경』ㆍ『역경』ㆍ『예기』ㆍ『춘추(좌씨전)』)이 존재하였음을 증언하고 있음도 참고할 수 있겠다.

한편, 신라 지역에서도 최근에 와서 유교경전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된 바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울진 봉평신라비(524)에 『논어』팔일편(八佾篇)에 나오는 “획죄어천(獲罪於天: 하늘로부터 죄를 얻다=벌을 받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점, 임신서기석(552년 추정)에 “시상서예전(詩尙書禮傳: 『시경』ㆍ『상서』ㆍ『예기』ㆍ『좌전』)”이라는 구체적인 유교경전 목록이 등장하는 점, 마운령 진흥왕순수비(568)에 『논어』헌문편(憲問篇)에 나오는 “수기이안백성(脩己以安百姓: 자기 수양을 해서 백성을 편안케 하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금석문 자료들은 진흥왕대(540~576)를 전후한 6세기 신라 사회에 유교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었을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더 나아가 8세기의 기록 내지 유물들은 당시에 유교문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8세기에 활동한 설총이 유교의 9경을 읽어 후생들을 교육하였다는 기록, 원성왕 4년에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유학 교육이 제도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뿐만 아니라, 『논어』 공야장편(公冶長篇)의 일부가 서사되어 있는 인천 계양산성 및 김해 봉황동에서 출토된 『논어』 목간(7ㆍ8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은 당시의 유교경전 학습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대한국의 유교문화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에 전래되어 발달되어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세우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목들을 교시(校是)로 삼고 있다. 앞서 살펴본 우리 조상들의 유구한 유교문화적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21세기의 명실상부한 글로벌 리딩대학으로의 비상을 꿈꾸는 성균관대학교의 비전 달성에 모든 성균인들의 열정이 한데 모아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권인한 교수
국어국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