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민진 기자 (kmjin0320@skkuw.com)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 존중(尊重)이라는 단어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높이어 귀중하게 대한다’라는 의미다. 이러한 존중은 나의 도량이 좁은 탓에 상호간의 기브엔테이크가 가능한 관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몇몇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인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누군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군가를 존중하는 일은 내가 존중받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그런 나의 일상에 혐오라는 단어가 스며든 지는 채 몇 년이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 내게 혐오의 감정은 냉장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곰팡이가 핀 식빵이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등장해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바퀴벌레의 등장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혐오라는 단어는 나의 언어생활에 불현듯 들이닥쳤다. 처음 접한 ‘극혐’ ‘ㅇㅇ충’ 같은 신조어들은 내게 다소 부담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혐오 표현들은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특유의 강렬함을 무기로 나와 지인들에게 스며들어왔고 지각없이 우스갯소리로 줄곧 쓰였다.

이런 각종 혐오 표현들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은 이번 기획을 준비하면서였다. 혐오 표현은 칼끝을 주로 소수자에게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시된다. 최근 한 에어비앤비의 호스트가 한인 여성 손님에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숙소 예약을 일방적으로 취소당한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부당함을 느낀 손님이 호스트에게 에어비앤비에 신고하겠다고 전하자 호스트는 “이 나라가 외국인에게 명령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그게 바로 우리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둔 이유다”라며 오히려 그를 조롱했다. 이러한 사례는 트럼프가 쏟아내는 혐오 표현들이 미국 사회에 분명히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혐오 행동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혐오 표현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 상황에 암울해 있을 수만은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혐오의 정서에 ‘연대’의 움직임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재특회는 재일한국인을 대상으로 혐오 표현을 일삼아온 극우 세력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도쿄나 오사카 거리에서 ‘조선인은 떠나라, 조선인은 죽어’라는 구호를 거리낌 없이 외쳤다. 이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양심 있는 일본 시민들은 ‘노 헤이트’라는 팻말을 들고 이에 맞섰다. 혐오 표현에 반대하는 ‘카운터(Counter) 운동’을 통해 연대를 실천한 것이다.

개인의 사사롭고 불합리한 감정들이 혐오라는 단어 하나로 너무도 쉽게 포장되고 있는 요즘이다. 혐오 표현을 쉽게 내뱉기 전에 말을 곰곰이 곱씹으며 그것의 위험성에 대해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민해보자.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이 분별없이 오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존중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당신을 존중하고 당신이 나를 존중하는, 구성원들이 ‘높이어 귀중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