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이십 대 청춘에게 인생이란 은퇴와 함께 끝이 나는 것일까.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본인이 사망하기 전까지 삶에 대한 계획이랄까 이런 것을 연령대별로 구체적으로 적어 보라고 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언제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고, 개인 사업을 시작하고, 해외로 이주를 하고 등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는 모두 성인전기와 중년기에 대한 이야기로 노년기에 대한 언급이 놀라우리만치 ‘하나도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쩌면 20대인 학생들에게 40년 이후의 일을 생각하기는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노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접한 경험이 없어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학생들이 알고 있는 노인은 SNS 상에서 접하는 노인, 산에서 술을 마시고 버스에서 자리양보를 강요하는 노인인지 모르겠다.  
에이지즘(Ageism)은 노화(aging)와 노인(the aged)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노인에 대한 차별을 의미한다. 오래 살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되어 미래의 나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 틀딱(틀니를 딱딱거리다)이라는 신조어를 처음 접하였는데 그 비하의 강도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노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자신이 노인이 되기 전까지 이를 깨닫기 어렵다. 노인과 함께 물건을 사러 가 본 사람이라면 판매원이 노인을 건너뛰고 자신과 눈을 맞추려 애쓰는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제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세요’라고 측은하게 여기는 듯한 미소를 띤 채 말이다. 틀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노인을 폄하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노인을 소외시키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오히려 문제가 심각하다. 

일러스트Ⅰ유은진 기자 qwertys@

그러고 보면 학생들이 자신의 노년기를 공백으로 남긴 이유가 어쩌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 자신을 생각하기 싫다는 무의식의 발로였는지 모르겠다. 노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젊은 우리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노인에게 적용하는 오류와 모순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족과의 시간이 더 애틋해지는 것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준에서 노인은 심리적으로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노인조차도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판매원 앞에서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 익숙해지고 당연해지고 ‘더 젊게 사셔야 한다’는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무력해진다.
우리는 미래의 우리를 위해 평범한 노인들의 일상생활을 노인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노인들이 자신의 배우자와 손자녀를 돌보고 있다. 이러한 돌봄노동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는지와 같은 접근은 젊은 사람의 ‘생산성’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라 치고 그만 두자. 노인이라고 하면 치매, 노후파산, 고독사 아니면 지혜와 경험 같은 단어를 연상하는데 우리 주변의 노인은 이 모두일 수도 있고 하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노년기를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계획하려면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노인, 노인 관련 통계가 아닌 내가 아는 노인들의 하루, 한 달,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이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를 관찰하고 질문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때 섣불리 우리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지금 노년기에 진입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류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던 그런 사람들이다.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신이 건강하고 교육수준이 높고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통신기기에 익숙하다. 따라서 이들을 기점으로 하여 노년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점진적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이들이 개척해나갈 신(新)노년기를 통해 미래의 나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 일이다.

 

최희정 교수
소비자가족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