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병준 기자 (hbj0929@skkuw.com)

소록도 중앙공원 초입에 위치한 검시실 전경.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상고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한센인들에 대한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지난 2월 15일 대법원은 정부 정책에 의해 단종·낙태 수술을 받은 한센인 남성 9명에게 3000만 원, 여성 10명에게 4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한센인들에게 시행한 단종·낙태 수술은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침해행위로서 그에 관한 동의·승낙이 없었다면 헌법상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 태아의 생명권 등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인격권 및 자기결정권, 내밀한 사생활의 비밀 등을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행위”라고 밝혔다. 이어서 대법원은 “원고들에게 시행된 수술 등은 위법한 공권력 행사이므로, 국가는 그 소속 의사 등이 행한 위와 같은 행위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을 부담한다”며 정부의 책임을 명시했다. 해당 판결은 2011년부터 제기된 한센인 539명의 집단소송 5건 중 6년 만에 나온 첫 확정판결이었다.

지난달 25일 버스를 타고 6시간을 달려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 도착했다. 소록도 내 거주지역 인근에서 장희옥(가명·80)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2011년부터 소송을 제기한 한센인 539명 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 확정판결에 포함되지 않았다.

소록도에 들어왔던 1952년 당시 그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소록도 인근 마을의 부잣집 막내딸이었던 그는 한센병에 걸려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는 역사의 현장에서 소록도의 아픔을 듣고 지켜보고 함께한 산 증인이었다.

그는 낙태 수술을, 남편은 단종 수술을 받았다. 낙태된 그의 아이는 포름알데히드 병에 담겨 전시됐다고 한다. 그는 “옆집 처자는 임신 8개월이 돼서 낙태 수술을 당했다”며 “배를 갈라 나온 아기가 울자 의사도 간호사도 어찌할 줄 몰라 해서 결국엔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임산부 둘이 동시에 낙태 수술을 받은 경우도 있었는데 한쪽은 아이만 죽고 한쪽은 엄마만 죽었다”고 덧붙였다.

겨울의 흔적

봄이 임박한 겨울의 끝에서 소록도에는 비가 내렸다. 겨울밤처럼 길고 어두웠던 야만의 흔적은 소록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소록도중앙공원의 초입에서 감금실과 검시실의 지붕이 비에 젖어 빛났다.

감금실은 1935년 제정된 ‘조선나예방령’에 따라 설치됐다. 감금실은 두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H자 형태였다. 건물마다 한 평 남짓한 방들이 3개씩 있었고, 방마다 얼굴 하나 들이밀 수 있는 만큼의 창문이 나 있었다. 창문으로 얇은 한 줄기 자취를 남기며 들어와, 어두운 방바닥에 박힌 햇살 자국은 다만 한 옴큼이었다.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은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이곳에서 감금(監禁), 감식(減食), 금식(禁食), 체벌(體罰) 등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고 쓰인 안내문이 감금실 앞에 서 있었다.

두 건물을 잇는 복도에는 시 한 구절이 걸려있었다.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 내 국부에 닿을 때 / …오늘도 통곡한다.’ 한센인 이동(李東)이 쓴 ‘단종대’라는 시다. 그는 일제하 감금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단종 수술을 받았다.

같은 해 설치된 검시실은 감금실과 이웃해있었다. 건물은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입구의 넓은 방은 사망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사용됐고 안쪽은 주로 검시 전의 사망환자 시신을 모시는 영안실로 쓰였다. 영안실 안에는 수감자를 상대로 단종 수술을 자행한 '단종대'가 보존돼 있었다. 단종대는 나무 재질이었고 등받침대의 이곳저곳이 파여 속살을 드러냈다. 파인 자국마다 단종대는 야만의 역사를 간직한 채 말이 없었다.

겨울의 역사

한센인에 대한 단종·낙태 수술은 1935년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한센병은 1900년대 초 유전병이 아니라 전염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1950년대부터 완치 가능하다고 인식된 질병이다. 하지만 정부는 병이 유전된다는 잘못된 편견 하에 해방 뒤에도 단종·낙태 수술을 이어갔다. 정부는 1954년 ‘전염병예방법’을 제정하면서 한센병을 비교적 전염력이 낮은 제3종 전염병으로 분류하면서도 다른 제3종 전염병인 결핵이나 성병 등과 달리 한센병에 대해서는 강제격리정책을 유지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지난 2월 15일 판결문에서 “이는 한센병이 다른 전염병과 달리 외모에 변형이 생기고 사회적 차별과 편견이 심하다는 이유에 기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단종 수술을 받을 것을 조건으로 남성 한센인에게 부부동거를 허락해주는 정책과 여성 한센인에게 임신과 출산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정책은 1990년대까지 유지됐다.

한센인에 대한 이 같은 차별에 대해 공식적 배상이 이뤄진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일본 정부였다. 일본 정부가 2006년 한센보상법을 개정해 한국과 대만 등 일제 강점기에 강제 격리된 한센인들에게 800만 엔(8000만 원)씩 보상하자 우리 정부는 뒤늦게 2007년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하지만 일부 한센인들에게 지급된 보상은 월 15만 원에 그치는 생활지원금 수준이었다. 한센인들은 2011년부터 한센인권변호인단과 함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한센인을 구한다'는 뜻으로 미카엘 천사장이 사탄을 밟고 창으로 찌르는 형상의 소록도 중앙공원에 세워진 구라탑(救癩塔).

봄을 기다리는 사람

지난달 29일 서울 삼성동의 화우 법무법인 회의실에서 한센인권변호인단장 박영립(64)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첫 확정판결을 승리로 이끈 ‘한센인들의 대부’다. 그는 “국가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데, 한센인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단순 생활지원이 아닌 일괄보상을 위해 2011년부터 한센인단체와 함께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판결에 대해 “분명 환영할 일이지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재판에 참여하는 한센인들은 평균 80세, 젊으면 70세로 연세가 많다며 재판이 빨리 진행되지 않으면 ‘제사상 판결’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한 판결이 뒤늦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피해자들이나 가족들을 두 번 상처받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센인 단종·낙태 판결에 관한 앞으로의 과제로 그는 위자료 형평성의 문제를 짚었다. 539명이 제기한 총 5건의 판결 중 지난 2월 15일의 판결을 제외한 4건의 판결이 원래 1심에서 3000만 원과 4000만 원으로 위자료가 정해졌지만, 2심에서 모두 감액됐다. 이에 대해 그는 “그대로 확정되면 3000만 원과 4000만 원의 위자료를 받은 사건과의 형평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같은 피해에 다른 위자료를 배상하게 되면 이는 사법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내일(지난달 30일) 오전 10시에 그 4건 중 1건에 대한 상고심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남아있는 다른 재판들에 시금석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했다.

소록도에도 봄은 오는가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정부로부터 단종·낙태 수술을 받았던 한센인들에 대한 위자료 액수를 1인당 3000만 원, 4000만 원에서 2000만 원으로 삭감한 2심 판결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국가는 한센인 1인당 2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뒤집고 위자료 액수를 다시 산정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박 변호사는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법원에서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법리에 입각해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대법원의 판결을 정말 환영하고 한센인분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5일 봄이 임박한 겨울의 끝에서 소록도에는 비가 내렸다. 야만의 흔적 드리운 곳곳에 비가 내려 스몄다. 감금실과 검시실의 지붕이 비에 젖어 빛났다. 봄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