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현 차장 (skrtn1122@skkuw.com)

 

2015년 7월 5일(독일 현지시각) 군함도 탄광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정식 등재됐다. 지난 6일 나가사키 현에 위치한 군함도를 직접 방문해보았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 군함도

오전 8시 55분, 군함도에 가기 위해 나가사키 항을 찾았다. 항구엔 나가사키 페리 터미널(이하 페리 터미널)이 있다. 페리 터미널 정문을 들어서자 군함도 매표소가 보였다. 현재 군함도는 일본 내 인기 관광지다. 한달 전부터 예약이 들어차 당일에는 표를 구하기 힘든 수준. 이 날도 모든 배편이 매진됐다. 기자가 매표소 직원에게 예약 메일을 내밀자 직원이 지도를 건네줬다. 기자가 예매한 표는 ‘시멘 상회’ 배편으로 페리 터미널에서 도보로 10분 떨어진 항구에서 출발한다. 군함도 배편을 운항하는 회사는 페리 터미널 말고도 네 군데가 있다. 하루에 2편씩 총 10편이 관광객을 싣고 군함도를 오간다.

오전 9시 40분, 항구에 도착해 탑승 수속을 밟았다. ‘무단행동을 하지 않겠다’, ‘가이드를 잘 따르겠다’ 등의 내용이 담긴 서약서에 사인한 뒤 배에 탑승했다. 배에서는 ‘군함도, 미래로’라는 제목의 VCR이 상영되고 있었다. 1890년 미츠비시 합자회사는 군함도를 매입해 해저탄광으로 개발했다. 한창 활성화되던 시기에는 연간 석탄 생산량이 41만 톤에 달했다. 1960년대에는 인구밀도가 도쿄의 9배에 이르렀고 △수영장 △영화관 △파칭코 등 근대화 시설이 들어섰다. 군함도 탄광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오전 10시 10분, 어느새 배는 승객들로 가득 찼다. 서약서를 쓸 때 슬쩍 본 탑승객 명단에 외국인은 기자 혼자였다. 옆자리 남성에게 말을 걸어보니 대학생인 그는 친구 4명과 함께 군함도를 보러 왔다고 한다. 군함도가 일본에서 유명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유명해졌다. 나도 그전까지는 군함도를 몰랐다”고 답했다. 오전 10시 29분, 마지막 승객이 달려와 배에 오른 뒤에야 배가 출발할 수 있었다.

출항 후 가이드는 나가사키 해변을 둘러싼 미츠비시 공사현장을 가리키며 “미츠비시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기업”이라고 소개했다. 잠시 후 미츠비시 공사현장을 설명하던 가이드와 직원들이 재빠르게 창문을 닫기 시작했다. 흐린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배가 심각하게 출렁였다. 승객들은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즐거운 얼굴이었다. 스피커에서 “타노신데쿠다사이(즐겨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오전 11시 20분, 군함도에 도착했다. 가이드를 따라 섬 관광이 시작된다. 전달받은 군함도 한글 안내서를 펴들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군함도의 근대화 시설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룬다. 곧이어 가이드가 군함도의 최대 볼거리라고 불리는 30동 건물을 소개했다. 1916년 다이쇼 5년에 지어진 30동 건물, 일본 최초의 고층아파트다. 관광객들은 30동 건물을 휴대폰에 담았다. 가이드를 따라 왔던 길을 뒤돌아 걸어간 곳에 출입 제한 표지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행로조차 마련되지 않은, 강제 징용의 역사가 쓰인 장소다.

강제 동원의 현장 군함도

제한구역 표지판 너머에 군함도의 진실이 묻혀 있다. 군함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된 곳이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은 전쟁을 위한 에너지, 군수물자 생산에 조선인들도 동원했다. 국무총리 산하 기관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발표한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군함도) 탄광 강제 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 조사>(2012)에 따르면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약 800여 명의 조선인과 200여 명의 중국인이 이곳에 강제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제 동원된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일본 나가사키대학 다카자네 야스노리 명예교수에 따르면 ‘군함도에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가 없어 군함도는 지옥섬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노동은 12시간씩 2교대로 이뤄졌다. 해저탄광의 평균 온도는 45℃, 습도는 95%에 이르렀다. 한 매체가 전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고구마 썰어서 말린 것, 콩기름 짜낸 찌꺼기 등이 식사였다고 한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800여 명 중 122명이 군함도에서 사망했다. 생존자 역시 몸 성한 곳 없었다. 강제 동원 생존자 김형석 씨는 시력을 잃었다. 그는 당시 석탄을 채취하러 들어간 지하갱도가 너무 더워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팔에 묶은 수건으로 닦곤 했는데, 그때 들어간 땀과 석탄가루에 시력을 잃게 됐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가이드의 안내 멘트 △군함도 안내서 △배 안의 VCR 영상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군함도에는 수시로 높은 파도가 몰아쳤다. 가이드는 “48m 높이의 파도가 치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러나 강제 동원된 조선인에겐 공포의 파도였다. 생존자들은 ‘숙소가 지하에 있었다. 파도가 높은 날은 숙소가 물에 잠겼다. 널빤지로 창문을 겨우 막았다’고 증언했다.

가이드는 관광객들을 마지막 코스인 목숨 계단으로 안내했다. 그는 이곳을 “해저 탄광으로 가는 곳”이라 소개했다. 설명은 그뿐이었다. 이 계단은 지하 600m의 해저 탄광으로 가는 입구에 닿는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작업을 끝내고 제 발로 이 계단을 올라온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전해진다.
계단을 배경으로 관광객들이 저마다 기념촬영을 했다. 오사카에서 왔다는 3명의 청년은 백 텀블링을 하면서 요란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시멘 상회 배를 타고 온 관람객들이 기념촬영을 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뉴멘’이라는 회사의 배를 타고 온 관광객 무리가 입구로 들어섰다. 무리에는 외국인 남녀 2명이 있었다. 영국에서 온 그들은 현재 후쿠오카에 살고 있다고 했다. 기자가 군함도의 역사를 아느냐고 묻자 그들은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인(조선인)의 강제노역 피해 역사를 아느냐는 질문에는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일본 최초의 고층 아파트 30동 건물. 조선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2013년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 동원 사실을 은폐한 채 군함도 탄광이 포함된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당시 우리나라 외교부는 이웃 국가의 아픔이 있는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이 유산 등재원칙과 정신에 맞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일본 근대산업시설에서 의사에 반한 강제노동이 있었음(Forced to Work)’을 등재 결정문에 명시하기로 우리나라 정부와 합의했다. 그러나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2015년 7월 5일, 당시 일본 외무상 기시다 후미오가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라고 입장을 번복해 논란이 일었다. 현재도 일본은 군함도 탄광 강제 동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군함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잘 포장된 산업혁명유산으로서의 군함도 역사만을 안내받는 이유다.

피해자로만 부각된 일본,
가려진 가해자 일본

짧은 탐방을 마치고 다시 배를 타고 항구로 돌아가는 길. 직원들이 군함도 관람기념증명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증명서엔 ‘세계문화유산 군함도’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낮 12시 40분, 항구에 도착해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으로 향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군함도 탄광에 징용된 조선인들이 도시 청소작업에 동원됐다. 그들은 지옥섬에서 지옥의 땅으로 옮겨졌다. ‘나가사키 재일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회’에 따르면 당시 나가사키 현에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 약 7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중 2만여 명이 피폭 피해를 입었고, 1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가려진 역사는 군함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는 조선인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원폭자료관에서 만난 동북아문화재단 남상구 박사는 “자료관의 역사는 1943년부터 시작한다. 피해자로서의 일본만 기록된 것”이라며 “자료마다 피해자 수도 다르다. 조선인 피해자를 포함하기도, 안 하기도 한 것이다. 자료관에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숫자에 들어가 있는 정도가 끝”이라고 전했다. 바로 옆으로 교복을 입은 여학생 무리가 지나갔다. 나고야 현 아이치 시의 한 중학교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다. 한 여학생에게 역사 시간에 조선인 피해자에 대한 얘기도 배우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조선인에 대해선 들어본 적 없다”였다.

여학생 무리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가자 외국인 남성이 홀로 자료를 보고 있었다. 모로코에서 온 그는 1년째 일본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는 “히로시마 원폭자료관에도 갔었다. 나는 당시에 조선인들 역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일본의 피해를 중심으로 서술돼있다”며 “일본은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출입을 제한하는 표지판. 이 너머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현장이 있다.

은폐된 진실을 찾는 작은 움직임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려 하는 곳이 일본 내에도 있다. 오다 마사하루 평화 기념관, 다카자네 명예교수가 이사장으로 있는 이곳은 군함도의 조선인 강제 징용, 조선인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 등 일본 정부가 외면하는 진실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층 중앙 벽에는 “몰랐습니다. 진짜의 것을. 좀 더 알고 싶습니다. 진실을”이라고 적힌 패널이 붙어 있다. 그 옆엔 “인간을 돌려다오”라는 제목의 강제 징용자들의 시가 자리하고 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온 시각, 다시 나가사키 항으로 이동했다. 몇 시간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올 터였다. 아침이 밝으면, 또 다시 군함도로 가는 뱃길이 열린다.

군함도는 나가사키 항에서 배를 타고 40여 분 들어가면 닿는다. 약 30년간 사람이 살지 않았던 무인도다. 2015년 7월 5일, 군함도 탄광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제는 배가 만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