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고등학생 때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도 철학과에 원서를 넣었었다. 덕분에 주변으로부터 크고 작은 질타를 받은 기억이 있다. 당시 내 고집을 회상해보자면 이렇다. 나는 철학자들의 말과 생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내가 무지했던 영역에 그들의 통렬하고 예리한 지적이 자리 잡을 때의 희열은 쉽게 느끼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옳았기에, 그들을 통해 더 많은 걸 배우고, 그들의 생각을 훔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의 생각을 배워 나간다면, 나도 위대한 사람이 되겠구나 싶었다.
철학과에 가진 못했지만, 대학에 와서도 이 욕구는 없어지지 않았다. 철학자들의 서적을 읽고, 그와 관련된 강연을 찾아 들었다. 나름대로 그들의 생각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공부했다. 솔직히 유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칸트의 생각, 흄의 생각, 하버마스의 생각, 사르트르의 생각.
칸트의 이성, 흄의 감정, 하버마스의 담론, 사르트르의 실존.
그러던 내게 적잖은 충격을 준 말이 있었다. 평소 듣던 팟캐스트에서 게스트로 나온 철학자 강신주의 발언이었다. "요새 왜 강단에 보이지 않느냐"라는 물음에, 강신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철학자의 가르침은 '내 말 따르지 마' 다. 그런데 요새 대중은 어느 순간 내 얘기에 고민을 하기보다, 그것을 마치 성경이나 불경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순간 벙 찐 상태가 되었다. 1학기 종강을 앞둔 즈음의 일이었다.
빨리 감기를 하자면, 이후로 나는 꽤 많은 질문을 달고 사는 놈이 되었다. 어느 누구의 생각도 정답일지 아닐지 모르는 거다. 아니,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의 생각도 따를 이유가 없다. 그저 그들의 생각은 내게 고민의 화두일 뿐이었다. 물론 화두가 있어야 이야기가 시작되듯이, 그들의 생각은 분명히 내 발전의 자양분이 된다. 다만 주어진 화두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내 몫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줄 지혜가 없다. 지혜는 너희 스스로가 낳는 거다. 나는 대화를 통해서 그 지혜를 낳는 것을 도울 뿐이다." 임제스님은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살불살조살부살모(殺佛殺祖殺父殺母)]."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말한다. “짜라투스트라를 따르지 않아야 짜라투스트라가 너희에게 갈 것이다.” 각자가 당당한 짜라투스트라가 되길 바랐건만, 되려 짜라투스트라를 따르려 하니, 짜라투스트라는 떠나고 만다. 니체를 따라서 니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니체를 따라서 나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비단 철학자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라는 갈망 아래 지속되었던 삶이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현실이 그 우상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깨달음이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우상을 부수고 나오는 존재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20대 초입에 선 우리네만큼 우상의 존재가 절대적인 경우도 없다. 위태로이 절벽 끝에 서있는 우리에게, 저 멀리 보이는 우상이야말로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상을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봐야 소용없다. 우상에게까지 도달한다 치더라도, 우상이 있는 곳이 또 다른 절벽 끝이 아니라는 보장 역시 없다. 가는 길은 또 얼마나 위험할지 모른다. 결국, 그 위태로움 속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너머에 있는 것이 또 다른 절벽 끝은 아닌지, 디디는 지반은 안전한지,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아닐까.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채수한(글리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