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현 기자 (skrtn1122@skkuw.com)

2014년의 나는 행동하지 않는 자들이 싫었다. 그들을 향한 나의 분노는 ‘세상이 이 모양인데, 왜 움직이지 않는 거야!’라는 답답함의 발현이었다. 그들의 행동하지 않음이 내겐, 곧 부정의에 대한 침묵이었고, 종국에는 동의로까지 치환되었다. 그때의 내겐, 행동하지 않는 자들이 비겁해 보였다. 나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15년의 나는 지난 시간의 반작용인지, 행동하는 자들이 불편해졌다. 마치 그들이 행동하지 않는 이를 자신의 잣대로 경멸하고 무지한 자로 치부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스스로 찔렸던 것일까. 나는 또 다른 극단에 서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모 아니면 도. 2014년의 나도, 2015년의 나도, 결국 어설픈 이분법에 갇혀 있었단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내겐 다양성이란 게 없었다. 나는 각각의 극단적 입장에 서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이들을 그냥 내가 선 곳의 완전한 대치점, 그러니까 완전한 상극점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마음대로 오독하고, 그들의 입장을 마음대로 정하고, 나는 마음대로 그들에 대해 피로감을 느꼈다. 행동하지 않는 자는 ‘비겁한 자’로, 행동하는 자는 ‘극성스러운 자’로 놓고선.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행동하는지,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는지, 또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행동하고 있는지, 모든 변수를 제외하고선.
창피했다. 내 선입견에 갇혀 개인의 행동을 마음대로 해석한 내가 꼴사나웠다. 양극의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나는 외면했었다. 그래서 사실 성대신문에 입사해 부서를 정할 때, 사회부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사람과 세상을 담백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내가,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담는 사회부에 들어가도 될까.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사회부에 들어왔고, 사회부에 들어왔기에 더욱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사 소재 하나를 고르는 데에도 신중했고, 어떻게든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를 미친 듯이 달군 현 사태를 맞이했다.
이번 사태는 내게 ‘다양성’이 뭔지를 알려줬다. 목소리는 하나 돼서 광장에 울려 퍼지는데, 역설적으로 나는 다양성에 대한 고찰의 기회를 얻었다. 하나된 목소리에서, 어우러지기 이전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내겐 들렸고 지난날의 내가 보지 못했던 사태들이 가깝게 다가왔다.
지난 광화문에는 약 100만 명에 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였다. 그 속엔 지난날의 내가, ‘영원히 행동하는 자’, ‘영원히 행동하지 않는 자’로 단순히 양분해버리고 말았을 사람들이 속해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 속에서 합당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