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마냥 어릴 때는 세상이 동화와 같을 줄 알았다. 나는 여자였어도 공주이기보다는 기사였고, 용감하게 악당과 맞서 싸워 사람들을 구했다. 글을 더듬더듬 읽었어도 불을 뿜는 용과 모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 세계에 대한 기대는 내게 마치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만큼의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아쉽게도, 조금씩 커가면서 맛본 가장 큰 배신은 “동화는 동화일 뿐”이라는 것. 이야기책에서 나오듯이 나쁜 악당이 실체화되어 내 앞에 나타난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타고난 영웅이 아니었다. 허나 어릴 때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 아직 때가 아니야.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면 나는 나쁜 괴물을 물리칠 용사가 될 수 있겠지. 이 모든 이야기는 내가 어른이 되고 능력을 갖추면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다. 근본 없이 자신만만하고 황당해서 더 귀여운, 한 소녀의 현실에 대한 치기 어린 분노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스물, 맞닥뜨린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만 굴러갔다. 책을 읽는 동안 사람들은 스스로가 주인공인 것 마냥 의기양양해하지만, 현실에선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악당은 여전히 나에게까지 들리기 바쁜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와 다를 바 없는 성실하고, 때론 게으른 사람들만이 밥을 먹고 숨을 쉬며 그 자리를 채울 뿐이었다. 단조로운 일상. 나는 정말 영웅일까, 아니면 영웅의 꿈을 꾸었던 한낱 우주의 먼지에 불과할까.
세상은커녕 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고, 외로움 하나 어쩌지 못해 허덕였다. 내가 영웅이 아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20년이 걸렸다. 그럼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꼬박 1년 반을 바쳐 고민했던 단 하나의 물음이었다. 삶에 대한 깊은 허무주의에 빠진 채로 영혼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삶의 목적을 잃으니 방향성이 있을 리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나는 휘청였다. “세상에는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좋아서 사는 사람도 있어. 당장 내일이 기대되는 그런 사람들.” 그래도 나보다 5년 더 세상에 발 디디고 있었다고, 오빠가 어느 날 내게 새로운 관점을 던져주었다. 그 길로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내일이 기대된다.’라…. 그들이야말로 영웅인 걸까 하는 호기심이 반짝. 개강 후 으레 그렇듯 바쁘다는 이유로 삶에 대한 성찰 따위 할 겨를도 없이 희미해져 가던 날들을 지나던 와중, 국가적 위기가 도래했다. 그래도 대학생이라는 젊은 지성인의 타이틀은 걸고 있으니까, 혹은 남들이 다 하니까. 어떤 이유에서였건, 나는 어느 토요일, 광화문 광장 바닥에 많은 사람과 함께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었고, 머리를 깨치는 한기 속에서 깨달았다. 아! 나‘도’ 영웅이구나. 세상은 동화보다 훨씬 아름답고 공평한 공간이었다. 세상은 단 하나의 영웅만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가치를 가지고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알아주면 되었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나와 길을 함께 걷고 있음을 볼 줄 알게 되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서로를 풍자하는, 속칭 ‘까내리기’에 익숙해진 탓에 칭찬에는 인색해져 버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잊은 채로, ‘까내려’지지 않기 위해, 용을 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각자가 가진 보석이 있다. 다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거나 어디에 두었는지 까먹었을 뿐이다. 지금 당신, 삶이 버겁다고 느껴지진 않는가? 그렇다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사회가 당신에게 지운 책임과 무게들을 내려놓고 너의 보석을 꺼내보자. 다만 참여할 줄 아는 것도, 잘못을 잘못이라고 생각만이라도 할 줄 아는 것도 보석이다. 자, 당신의 보석은 지금 어디,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김미주(심리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