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과캠 만남 - 박현근(건축공학 96) 동문

기자명 조수민 기자 (soommminn@skkuw.com)

 

하루를 마치면 우리는 모두 집으로 간다. 집. 우리의 이야기가 있는 곳.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집을 짓는 건축가 박현근(건축공학 96) 동문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 김수현 기자 skrtn1122@

그림을 못 그리는 건축공학과 학생
“제 고향이 마산이에요. 고등학교 때 신문에서 봤는데 그때 마산에서 유명한 5대 갑부가 다 기업가고 한 분만 건축가였어요.” 박 동문에게 건축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건축가가 되면 돈을 잘 버는 줄 알고 건축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건축가는 월급쟁이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인 것 같았거든요.” 박 동문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와 같은 학교에 가기 위해 삼수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국 그 친구와 같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우리 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건축 전공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많았던 그는 화가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화가로서 먹고사는 것이 힘들다며 박 동문이 그림 그리는 것을 싫어했고 이로 인해 그는 초등학교 이후로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교수님이 전공 과제를 나눠주시면서 복수전공생이냐고 묻더라고요. 워낙 어설프니까.” 반면 대학 때부터 쾌활하고 말솜씨가 좋았던 성격 덕택에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설계보다는 시공회사에 가라고 권유했다. “주변에서 제 성격이 설계랑 안 맞는다고 했어요. 설계하는 것에 맞는 성격이 따로 있는 건 아닌데 그림은 못 그리지만 쾌활한 성격이다 보니 교수님도 시공회사 입사를 권유했죠.” 하지만 박 동문은 건축가의 꿈을 쉽게 놓지 않았다. “시공회사를 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삼수해서 건축공학과를 올 때는 분명히 건축가가 되기 위해 왔는데 설계를 포기하고 시공회사를 가기에는 아쉬웠어요.”

학교 안팎에서 얻은 성장 동력
그가 건축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건축학과 사람들과 함께 지냈던 작업실이었다. “85학번 선배가 만든 작업실이 있었어요. 여기에 있었던 3년여의 세월이 설계를 평생 할 수 있는 바탕이 됐죠.” 작업실은 작년에 문을 닫았지만, 박 동문은 그곳에서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설계 수업을 여러 명이 함께 들으니까 수업을 통해 실질적인 건축 지식을 얻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배들과 작업실에 같이 살면서 전공에 관해 많이 배웠어요.” 그곳에서의 배움을 바탕으로 박 동문은 굵직한 공모전에 나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전공 수업뿐만 아니라 교양 수업도 건축가로서의 소양을 쌓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냐는 질문에 박 동문은 졸업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교양 수업 몇 가지를 꼽았다. “대학 때 전공 수업보다 교양 수업을 더 좋아했어요.” 계속해서 건축가의 꿈을 꿨던 박 동문은 학점에 매달리기보단 자신이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을 하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설계하려면 설계 공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설계할 때 만나는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과 소통을 하려면 인문학적 지식이나 정보가 많이 필요해요. 어떤 사람을 만나도 대화가 되는 것이 건축가의 기본 소양이죠.”
쾌활한 성격의 박 동문은 수업 외적으로도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그는 봉고차를 빌려 작업실 친구들과 전국으로 답사를 떠나고 자전거로 전국을 돌며 백혈병 어린이 돕기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또한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학과 야구 동아리 활동도 했다. “3·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어요. 4학년 때는 축제 중에 열린 토너먼트전에서 준우승도 했죠.” 그는 지금도 주말이면 종종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사회인 야구동호회에서 직접 선수로 뛰기도 한다. “설계는 체력 싸움이에요. 어느 한 사람 혼자서만 힘을 내서는 할 수 없죠. 그래서 건물을 설계했을 때 절대 누구 한 사람만의 작품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 면에서 설계와 야구가 비슷해요. 야구에도 설계처럼 스타플레이어와 조력자가 있지만, 타석에 들어선 순간은 어떤 사람이든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까요.”

 ‘건축가’라는 현실 속에서 답을 찾다
학교 수업과 여러 활동으로 건축가로서의 소양을 쌓은 박 동문은 대학 졸업 후 국내 굴지의 건축사무소에 입사했다. 입사 후 △대학교 △문화 시설 △병원 등 많은 공공건물을 설계한 박 동문에게 시민을 위한 건물을 설계할 때 느낀 점을 묻자 가장 먼저 아쉬움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대학교 건물의 경우에는 학생들을 위한 건물을 설계하기가 쉽지 않아요. 학생들을 위해 이러한 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건축주는 그런 것보다 기숙사 방 하나 더 짓기를 원하거든요. 그나마 건축가의 의견을 수용해주는 건축주나 학교도 있으면 좋은 건물이 나오는 거예요.”
흔히 건축가는 밤샘도 많고 박봉이라는 인식이 있다. 입사 4년 차를 맞았던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통닭을 먹고 싶다고 하는데 그걸 사 먹어도 되나 고민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돈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사표를 내고 한 달 동안 쉬면서 아내와 상의했는데 아내가 저한테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마침 같이 일하던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회사에서 함께 일을 하자는 제안이 왔고 그는 이직을 결심했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월급만으로는 집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처음 취업을 했을 때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고시원에 들어갔다. 그다음엔 회사에서 돈을 빌려 반지하로 갔고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빌리고 갚는 일을 계속 반복해야 했다. 7·8년 차에는 일이 너무 많아 집에도 매일 들어갈 수 없었다. “아내가 혼자 갓난아이를 키우면서 육아 우울증이 왔고 상황이 많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3개월 동안 휴직을 했고 다시 돌아왔을 때부터 좀 더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죠.” 그는 버킷리스트를 세웠다. 2013년 건축사 시험, 2014년 재귀당 입주, 2015년 건축사무실 오픈.

이야기가 있는 집
회사 일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는 건축사 시험을 준비했고 그의 집을 설계했다. 현실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박 동문이 집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용기로 자신의 첫 집인 ‘재귀당’을 설계할 수 있었다. 그는 성에 살고 싶다는 딸의 소망과 집에서 치유와 안식을 느끼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을 설계도면에 담았다. “우리 집은 일반적인 집 같지는 않아요. 안식과 치유의 느낌이 들게 집을 지어서 종교 시설 같은 느낌도 나죠.” 박 동문의 아내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재귀당’이라는 집 이름을 지었다.
물론 집이 지어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건축주이자 건축가이기 때문에 시공과정에서 말 못할 고충을 겪기도 하고, 재귀당이 지어지는 동안 살았던 양평의 임시 집에서 선릉역에 있는 직장까지 왕복 5시간을 출퇴근하는 데 써야 했다. “월요일 아침 8시 30분에 시작하는 회의에 참석하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죠. 한겨울 아침에 전철을 타면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그는 그런 과정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선택한 것을 하게 되면 굉장한 에너지가 생겨요. ‘나’의 가치는 내가 원하는 공간에 우리 가족하고 사는 데 있고 그것에서 기쁨이 오는 거죠.”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 재귀당은 그렇게 지어졌다.
2014년 7월 재귀당을 준공한 박 동문은 이듬해 같은 이름의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아 지었던 것처럼 다른 이들의 집도 그들만의 이야기를 담아 설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건축은 공간의 구성인데 가족한테 맞는 공간 구성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을 알아야 돼요.” 그는 건축주의 이야기를 설계에 담기 위해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가치관과 교육관에 대해서까지 대화를 주고받는다. “예전에 살았던 집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많이 일어났다면 새로운 집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동선을 만들어 싸움을 줄이는 거죠. 이런 것들 전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돼요.”
건축주와 건축가의 견해에 차이가 발생했을 때 박 동문의 다양한 주거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됐다. 그는 기숙사부터 아파트와 전원주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거형태를 경험했다. 그뿐만 아니라 건축주들에게 권하는 ‘이야기가 있는 집’에 지금 그가 직접 살고 있으므로 경험에서 나온 조언은 그들을 설득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견해차가 발생하더라도 지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으니까 결국은 설득을 해야 돼요. 제 경험들이 고민하는 건축주를 설득할 때 도움이 돼요.”

박 동문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재귀당의 모습
사진 | 김수현 기자 skrtn1122@

어떤 건축가가 될 것인가
박 동문은 대학 때는 재밌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고,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설계는 왜 이렇게 먹고살기 힘들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가 재귀당을 짓고 살아보니 건축가로서의 지향점이 달라졌다. 주택 설계를 하며 그곳에 살게 될 사람과 대화하고 그들이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건축사무소를 여니까 다들 이상하게 봤어요.” 그는 다니던 회사에서 임원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좋은 회사와 금전적인 보상, 시간적인 여유를 버리고 힘든 길을 나선 것이다. “강요받는 설계가 아니고 제가 해보고 싶었던 설계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원하는 공간에 살아보니까 그런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종종 대학교로 강의를 나가기도 하는 그는 대학생들에게 원하는 길을 가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기가 원하는 걸 모르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그건 평생 찾는 거라고 말해요. 평생 찾는 건데 당장 일 년 안에 찾으려니까 안 찾아지는 거죠.”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평생 생각하고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며 그들도 모르는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집을 지어주고 싶다는 그. 앞으로도 그는 원하는 삶을 향해 용기 있는 걸음을 한 발짝씩 내디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