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과캠 만남 - 박인석(기계 69) 동문

기자명 신재종 기자 (shinejj@skkuw.com)

 "그를 박토벤이라고 부른다. 예술가 스타일의 장발모양이 베토벤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지만 정말 베토벤을 닮은 것은 그의 열정이다. "
 어느 시인이 박인석(기계 69) 동문의 연주에 감명을 받아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박 동문은 기계공학 박사 출신의 40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 연구원이다. 기계공학만큼 듣기에 딱딱한 학문이 또 있을까. 그 손끝에서 화려한 교향악이 지휘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65세의 나이에 공학자로서, 또 음악가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박 동문을 만났다.

 

스무살, 갈림길에서
 1969년 봄, 우리 학교 기계공학부에 입학한 박 동문은 원래 공대에 진학할 생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부산에서 음악 활동을 해왔던 그는 음대에 진학하고자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돈 되는 공부를 하길 바랐다. 오랜 갈등 끝에 찾은 타협점은 공대에 진학하는 대신 음악 하는 것을 말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가기 싫은 공대 입학시험을 치렀고 이듬해 새내기 신분으로 상경했다. 박 동문은 4년간 꾸준히 평일에는 공대생으로, 또 주말에는 지휘자로 생활했다. “그 당시 학생 식당 우동 한 그릇이 40원이었어. 면 빼고 국물만 먹으면 20원이었는데 그렇게 아낀 돈으로 금요일 저녁마다 완행열차표를 샀지.” 음악 활동에는 부모님의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생활비를 아껴가며 음악인으로서 경력을 이어 나갔다. 한 달 생활비 만 원으로 방세 내고 공책 사면 남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입으로 들어가는 돈을 최대한 줄여야만 했다. 정말 궁할 때는 학교 앞 식당에서 밑반찬을 몰래 빼돌려 일주일을 연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매주 주말마다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로 부산을 오가며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활동했다.
 음악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학업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음대에 편입할 요량이었어. 그래서 학점 따려고 다른 친구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지.” 비록 음대 편입은 무산 되었지만, 그는 공학 공부에서 재능을 찾았다. 그는 한 학년에 40명이던 기계공학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공부 잘하는 친구’였다. “시험 기간만 되면 소위 좀 사는 친구들이 나를 집으로 불렀어. 핵심 시험 문제를 알려 달라는 거였지. 그 집에 가면 정말 잘 먹었던 기억이 나. 넓은 마당에 이층집이었는데 이 층에서 친구랑 공부하고 있으면 어머님이 닭을 삶아 주시곤 했어.”
 전공 공부하랴 음악 공부하랴 그는 몸이 두 개여도 시간이 부족할 만큼 바쁜 생활을 했다. “낮에는 공대 공부를 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했어. 전공 공부를 따로 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의 시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지. 그때 길러진 집중력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봐.”

공대 오빠 박토벤
 박 동문은 40년 이상 장발을 유지해 왔다. 군사정권 당시 서슬 퍼런 장발 단속도 그의 장발 사랑을 말릴 수 없었다. “장발끼리는 통하는 게 있어. 단속이 뜨면 서로 어디로 피해라 알려주곤 했지. 그렇게 단속을 피하다가 몇 번 파출소에 잡혀가 바리깡으로 머리 한가운데를 밀리기도 했어. 그렇다고 머리를 자르지는 않았지. 그냥 그 상태로 다니다가 영 부끄러울 때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기도 했어.” 그가 그토록 헤어스타일에 집착한 것은 ‘박토벤‘이라는 별명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박토벤이라는 별명이 나를 따라다녔어. 지금은 나잇살에 외모를 다 버렸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꽤 미남이었지. 움푹 파인 볼에 부리부리한 코가 베토벤 흉상이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다들 나를 박토벤이라 불렀어. 박인석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박토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니까.” 그는 자신을 미남이라 칭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강의실에 혼자 앉아 공부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종종 쪽지를 전해주곤 했어. 커피 한잔 하자는 여학생들이 정말 많았었는데, 그때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부끄러웠나 봐. 그 흔한 미팅 한번을 못 나갔으니 말이야.” 연애사를 묻자 수줍어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공대 오빠였다. 

음악인에서 공학인으로
 학부를 졸업한 박 동문은 다시 한 번 음악을 업으로 삼아 보고자 노력했다. “어느 시립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선발됐어. 이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날아갈 듯 기뻤지.” 기쁨도 잠시 그는 비전공자라는 벽에 부딪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신입 지휘자로 처음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음악 전공자가 아닌 것이 들통이 난 거야. 어떻게 하든지 음대 졸업장을 들고 오라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지.” 그는 그 자리에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이후 부산에서 박사를 마치고 대덕연구단지에서 자리를 잡았어. 정부 출연 연구소에서 공학자로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거야.”
 1970년대 오일쇼크 파동으로 에너지 절약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에 그의 기술은 빛을 발했다. 당시 박 동문은 대기로 버려지는 뜨거운 열을 회수하는 수평식 콘덴싱 설계 기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하여 대통령 만찬에 초청되기도 하였다. 국내외 기업체들의 러브콜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기업체에 가고 싶지는 않았어. 돈은 많이 받았겠지만, 그것보다는 순수한 연구를 하고 싶었거든.”

무엇이 천직인지
 연구로 바쁜 나날들 속에 그는 다시 한 번 음악인으로 재도약한다. “음악을 계속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받아 주는 데가 없으니까 내가 직접 만들었지.” 그는 1992년 대전에서 ‘부부합창단 & 메시야 윈드 앙상블’을 만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기악 전공자로 구성된 민간 오케스트라 ‘메시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IMF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는 등 힘든 일도 많았다. 수익금 전액을 중증장애인에게 기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적자가 나면 본인 사비로 메꾸는 일도 허다했다. “지금은 오케스트라가 자리를 많이 잡았어. 단원이 80명쯤 되니까 국내 민간단체로는 최대 규모인 셈이지. 하지만 정기적으로 연습한다는 것도 꿈만 같은 얘기야. 악기가 움직이면 돈이 드니까.” 우리나라에서 민간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신청하는 정부 또는 지자체 보조금도, 예술회관 대관도 매번 떨어져서 변두리 연주홀 밖에 대관할 수 없으니 안타깝지. 한번은 기업을 운영하는 동문 선배가 연주회에 찾아 왔길래 후원을 부탁했더니 그 이후로는 연락이 안 되더라고. 동문끼리도 안 도와주는 판국에 내가 욕심이 많은 건지도 모르지. 이 기사를 보고 동문들이 지원을 좀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
 박 동문은 2012년부터 매년 6월마다 ‘KOREA 호국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국내 작곡가가 작곡한 우리 얼이 담긴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연주하여 국민의 애국심과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취지다. 10년 이상 우리 음악만을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물음에 “한국인이니까 우리 음악을 연주하지,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라는 우문현답을 하며 “이제는 음악계의 반응이 좋아. 이번에 타 지역에서도 같이 연주하자는 요청이 있었어. 이제야 나를 인정해 주는 듯싶어”라고 말을 덧붙였다.
 일평생을 공학자로, 동시에 지휘자로 살아온 박 동문. 65세의 나이에 아직 두 가지 분야 모두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그를 만난 후 천직이란 무엇인지, 그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고민이 남았다. 그러다 뜻밖에 그가 남긴 문자메시지 한 줄에서 답을 얻었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아셨나요?” 그는  아직도 자신에 대한 관심이 어색한 ‘공대 오빠, 박토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