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캠 만남 - '순악질 여사' 코미디언 김미화(사복 01)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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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옥엽 기자 (oyheo14@skkuw.com)
일자 눈썹에 방망이를 휘두르며 남편을 들었다 놨다 했던 ‘순악질 여사’ 캐릭터로 김미화(사복 01) 동문은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어렸을 때부터 변치 않고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고 결국 그 꿈을 이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그녀. 현재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예술과 농업이 공존하는 카페, <호미>에서 그녀를 만났다.
코미디, 너는 내 운명
“어릴 때부터 끼가 있었어요. 가수 흉내를 잘 내서 동네 어르신들이 무척 예뻐하셨죠.” 그래서일까. 그녀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코미디언이 됐다. 학창 시절에도 그녀의 스승은 학교 선생님이 아닌 배삼룡, 서영춘, 구봉서 씨와 같은 당대의 유명 코미디언이었다. 재밌는 코미디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도 컸고, 또 잘할 자신도 있었다.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 옆집 쌀가게의 텔레비전을 보면서 코미디 기법을 익히고, 하루의 85% 정도를 코미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도 ‘저 아줌마의 저 복장은 이 역할을 할 때 사용해야지’라고 생각했고,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면 웃길 텐데’와 같이 생각했을 정도로 그녀의 하루는 언제나 코미디로 가득했다. 만화적인 발상으로 과장되게 분장하는 것을 즐겼던 그녀는 만화가 고(故) 길창덕 선생님의 ‘순악질 여사’ 캐릭터를 얼굴에 갖다 붙였다. ‘순악질 여사’ 캐릭터는 공식 시청률 67%라는 경이적인 호응을 이끌어내며 그녀에게 당대 최고의 인기를 안겨줬다.
코미디계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녀가 한창 코미디언으로 활약하던 당시 코미디는 저질 시비에 휘말렸다. “저는 어릴 때부터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고, 코미디에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코미디를 저질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보고 ‘과연 내가 코미디 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인가’ 되돌아보게 됐죠.” 그녀는 이후 중앙대에서 3년 정도 신문방송학과 연극영화학을 공부했다. 학문적 탐구를 통해 기존 코미디에 제기된 저질 시비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자 한 것이다. 이 정도로 코미디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각별했다.
인생의 자양분이 된 끊임없는 배움
그녀는 신에게 항상 2가지 소망을 이야기해왔다.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기를 꿈꾼다는 것과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이미 코미디언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녀에게 남은 꿈은 어려운 사람들 곁에서 따뜻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렇게 ‘사회복지’에 관심을 두게 됐고, 이를 더욱 체계적으로 공부하고자 그녀는 서른 중반이라는 나이에 우리 학교 늦깎이 학생으로 입학했다. “교수님이 강의하실 때 맨 앞자리에 앉아 눈을 마주치고 졸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젊은 친구들과 공부 하다 보니까 그 친구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죠.” 젊은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던 그녀에게 특히 점심시간은 학교생활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밥을 살 테니 같이 먹고 싶은 학생들은 와라’고 했더니 제가 듣는 수업이 끝날 때쯤 문 앞에 학생들이 바글바글할 정도였어요.”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꽃도 피우고, 학업적인 측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석·박사 과정을 선택한 이유 또한 명확했다. <개그콘서트>가 처음 만들어져 후배들과 함께 새 코너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와 후배들은 영화나 광고 패러디를 시도했다. “광고를 가지고 패러디물을 많이 만들었거든요. 광고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광고가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코미디와 굉장히 비슷하다’는 거였죠.” 그녀는 광고업계 종사자들이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노하우가 궁금했다. 그래서 우리 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 입학해 석사 과정을 밟았다. 박사 과정을 밟게 된 이유 또한 앞으로 새로운 코미디를 할 때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동양철학’이었다. 동양철학의 노자, 장자 사상에서 코미디와 비슷한 요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박사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졸업 논문만 남겨놓고 있는 상태다.
꾸준한 목소리로 사회를 변화시키다
김 동문은 여러 사회복지 단체의 홍보대사를 역임했고, 여성문제, 환경문제, 아동문제 등에 대해서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회에 참여 하다 보니 수많은 단체와 소중한 연을 맺기도 했다. 이렇게 활발한 사회참여를 보여준 그녀는 대학생들에게 “사회를 바꿔 나가기 위해서는 당장 대학 밖에서 큰일을 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하나하나씩 바꿔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바로 잡을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과감하게 목소리를 내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 고집이 있어서 제가 하기 싫은 행동은 절대 안 해요. 그래서 저 스스로 목소리를 낸 것에 대해서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양심이라고 생각하고요.” 반드시 누군가는 행동해야 사회가 바뀐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서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카페 <호미>로 시작한 제2의 인생
코미디언으로 큰 성공을 거둔 그녀는 고향인 경기도 용인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농촌에 내려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째다. 귀농 후에도 그녀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던 중 농부들이 성실하게 일하는 데 비해 그 만큼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분들을 위한 ‘문화 사랑방’을 만들었다. 문화 사랑방에서 기존의 유통과정 없이 농부들의 농산물을 직거래할 수 있도록 하고, 문화 기획을 통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 안에서 문화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계기로 시작된 예술과 농업이 공존하는 카페, <호미>는 농부들의 생활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그녀의 소망과 문화 행사 기획에 관심이 있는 남편의 소망을 실현해준 안성맞춤의 공간이 됐다. 실제로 <호미>라는 이름은 남편 윤승호 씨의 ‘호’와 김 동문의 ‘미’를 합쳐 만들었다. 아울러, 농부들이 사용하는 호미를 뜻하기도 한다.
나를 키운 팔 할은 코미디였다
그녀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그녀의 묘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제 묘비명은 ‘웃기고 자빠졌네’ 에요. 웃기다가 무대에서 쓰러지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는 거에요. 저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묘비명을 보고 한 번 더 웃었으면 좋겠어요. ‘묘비명 웃기네.’ 이렇게요.” 그녀에게 코미디는 그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뿌리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자신의 뿌리인 코미디를 잊지 않는다는 그녀는 죽을 때까지 코미디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열정적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활발한 사회참여를 보이면서도 가슴 한편에 언제나 코미디를 품고 있는 그녀. ‘웃기고 자빠질’ 그녀의 삶이 더욱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