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과캠 만남 - 김두환(약 56) 동문

기자명 강신강 기자 (skproject@naver.com)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드레는 한지 엷어서 흔들거리는/ 허풍선을 은근히 도탑게 꾹꾹/ 충전시키는가 다지르는가 쇠디우는가>
김두환(약 56) 동문이 며칠 전 소록도를 여행하며 쓴 시라며 내민 시의 한 연이다. 내년이면 팔순을 맞는 김 동문의 얼굴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일주일 중 하루도 빠짐없이 사무실로 나와 시에 대해 생각한다는 그는 영락없는 글쟁이였다.

▲ /한영준 기자 han0young@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도
 김 동문은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사라져 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고유어들을 캐내 새 옷을 입혀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하는 ‘순우리말 시인’이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한글인데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 사전을 따로 펴놓고 읽어야 할 정도다. “내 시를 읽은 사람들이 단어를 몰라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안타까워. 그만큼 우리가 우리의 말을 잃어버렸다는 말이니까….” 우리말의 수문장이길 자처할 만큼 우리말에 애정을 보이는 그는 시작 활동도 왕성하다. 김 동문은 올여름 출간된 시집 ‘어디쯤 가고있는가’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10권에 이르는 자신의 시집에 총 1,513편의 시를 실었다.
 그런 그가 36년간 낙원동에서 약사로 일했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큰 형님께서 의대에 가서 기술로 먹고살라고 하셨어. 나는 법대에 가려고 법대시험을 봤단 말이야. 형님 말씀을 듣지 않은 데다가 시험마저 떨어져 버리니까 큰형님한테 혼쭐이 났지. 그러던 중에 서울에 계시던 작은 형님께서 성대 약대 시험이 남아있다고 쳐보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쳤는데 합격한 거지 뭐. 허허.” 그는 약대에 진학한 이후에도 2년간은 고시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고시 공부가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반면, 약대 성적은 좋았기에 고시 공부를 접고 약학 공부를 계속 해나가기로 했다.
▲ 김 동문의 열번 째 시집 '어디쯤 가고 있는가' /ⓒ알라딘

 드레는 한지 엷어서 흔들거리는
 김 동문은 약대에 다니면서 약학 공부만 하지 않았다. 고시 공부도 했었고, 성대신문사에 찾아가 다짜고짜 일거리를 찾기도 했다. “당시에는 전공 서적이 비쌌어. 이걸 직접 인쇄해서 팔면 용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학보사에 찾아갔지. 그런데 거기서 글 쓰는 친구들을 보다 보니까 나도 한번 써보고 싶은 거야. 그때부터 습작을 쓰기 시작했어.” 혼자 상경하여 공부하다 보니 주머니 사정이 늘 여의치 않았던 그는 점심을 거를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학교 옆 창경궁으로 넘어가 당시(唐詩)를 읽거나 시를 썼다. 서당 집안에서 자란 김 동문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께 야단을 맞으며 한자를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시에도 눈이 갔던 것이다. 그렇게 쓴 글 중 괜찮은 작품을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의 대학생문예란에 응모했는데, 두 군데서 모두 입선을 했다. 자신감이 붙자 그는 글재주를 살려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약업신문>에서 소문을 듣고, 글을 써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했어. 그때부터 글을 기고하고 돈을 받기 시작했지. 원고료는 아니었고 용돈이었어. 노란 봉투에 담아서 주는 그 돈이 가난한 대학생에겐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시에 빠져 약학 공부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다. 3학년 때는 성적이 좋아서 가정교사로 추천받아 육군 대령 집 딸을 2년간 가르치기도 했다. 이때 맺은 인연을 계기로 김 동문은 입대 후에 군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수도육군병원의 피부과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어깨너머로 피부약 만드는 법을 배웠다. 김 동문은 이때 배운 기술로 제대 후에 약국을 열었다. 1964년 여름이었다. 이후 약국은 유명한 배우들이 그가 직접 제조한 피부약을 구하러 찾아올 정도로 번창했다. 약사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음에도 그는 항상 시를 쓰고 있었다. 김 동문은 오랜 세월 약사의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꿈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다.

 허풍선을 은근히 도탑게 꾹꾹
 김 동문은 약국을 운영하며 틈틈이 시를 써서 문예지나 조그마한 잡지사에 보냈다. 그러던 것이 시나브로 쌓이자 당시 ‘문학세계’ 발행인이었던 박남훈 시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약국 문을 연 지 23년 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박남훈 선생께서 약국으로 찾아왔어. 시를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한번 보여 달라 하시더라고. 그래서 발표했던 작품 몇 편을 보여드리니까 서정주 선생님과 박재삼 선생님께 데리고 가서 나를 추천해주셨어. 그렇게 등단을 한 거야.” 차츰차츰 시 세계로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 나간 김 동문은 △제2회 영랑문학상 본상 △제10회 허균문학상 본상 △제3회 순수문학 작가상 △제2회 한국신문학 대상 △제2회 성균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김 동문은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순우리말을 다시 자신만의 언어로 조탁하는 과정을 보면 공자만큼이나 호학자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두꺼운 국어사전이 까맣게 때가 타고, 두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었다. 그는 사전 속에 숨어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우리말을 찾아다녔다. “서정주 선생님의 시를 읽다가 그의 시어가 주는 독특한 느낌에 감명받아 사전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사전을 보다가 인상 깊은 단어를 하나하나 주워 담다 보니까, 자연스레 내 시에도 그런 말들이 담기게 됐지. 재미있는 일이야. 남들이 모르는 단어를 안다는 건.”

▲ 김 동문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국어사전 /한영준 기자 han0young@

 충전시키는가 다지르는가 쇠디우는가
 65세가 되던 해, 김 동문은 36년간 해오던 약국의 문을 닫고 시작 활동에 몰두했다. 그에게는 아직 펜을 내려둘 생각이 없다. 김 동문의 꿈은 평생 차곡차곡 모아둔 돈으로 문학관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문학청년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자나 깨나 시를 생각하는 그에게 시란 무엇일까?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것. 그게 내겐 시야. 시에 심취하다 보니 항상 모든 일을 시어를 고르는 것처럼 신중하고 깊게 생각하게 되잖아. 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잡는 거야.”
 나서는 길, 그가 영국에 있는 어린 외손자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가리켰다. 외손자가 학교에서 글만 쓰면 상을 받는다고 멋쩍게 말하는 그에게서 곰살궂은 시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