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속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

기자명 송윤재 기자 (songyoonjae92@skkuw.com)

▲ ⓒPandoreBoite

삶에 만족을 주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행, 알코올, 독서, 운동, 연애 등 많은 것이 있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만족이라는 것은 주체적인 행동에서 오는 만족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역시 주체적인 행동이 주는 만족감을 보여주지요. 소설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선택은 현재 ‘내 삶은 만족스러운가’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소설 속 여주인공 ‘유디트’는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와 같이 요동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나 ‘평온함’과 ‘만족’이 무엇인지 알게 되지요. 그동안 그녀가 살아온 삶은 타인에 의해 이끌려온, 수동적인 삶이었습니다. 아빠의 외도로 인해 다툼이 일상인 가정, 학생의 본분만을 강요하는 학교. 그녀는 그 어떤 곳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가출 후, 술집에서의 삶 역시 너무나 고단합니다. 손님의 분위기를 맞춰주기 위해 웃기 싫어도 웃고, 웃고 싶어도 웃지 못하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택시기사 ‘K’. 그는 이런 수렁에서 그녀를 건져 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그에게 몸을 내어줄 뿐, 어떠한 애정도 없습니다. 항상 추파춥스만 먹을 뿐이지요. 그와 잠자리를 하는 순간에도 추파춥스가 떨어지면 추파춥스를 요구합니다. 그녀에게 추파춥스는 손톱을 물어뜯는 것처럼 욕구불만의 표출인 것이지요. 그녀는 곧 같은 집에 살던 ‘K’의 형 ‘C’에게로 관심을 옮기지만 잠자리의 대상만 C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녀는 추파춥스를 탐합니다. 육체적인 쾌락이 줬던 즐거움마저 지루한 일상으로 굳어진 겁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날, 주문진으로 향하는 차 안. 그녀는 C와의 관계 중 사정하지 못하는 C에게 자신의 목을 졸라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어”라는 말을 남기고 유디트는 차에서 내려 폭설을 뚫고 사라집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희미하게 표출된 것 아닐까요. 단순히 육체적인 만족에 그치는 관계를 넘어, 죽음을 택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어느 날 그녀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는 의뢰인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점은 의뢰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게 구체적인 방향을 보여주고 의뢰인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는 것이겠지요. 유디트는 ‘그’와 만나며 삶의 재미를 발견합니다. 육체적인 관계만을 추구했던 ‘K’나 ‘C’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게 도와주지요. “언제나 내 뜻과 상관없는 곳에 내가 가 있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그를 만나면서 유디트는 한 몸과도 같았던 추파춥스를 잊어버립니다. 그녀는 결국 영원한 휴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소설은 비록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이었지만, 처음으로 주체적인 행동을 한 후 삶의 만족감을 느끼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유디트와의 계약을 성사시킨 뒤 비엔나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클림트의 그림을 보고 유디트를 떠올립니다. 소설 속 여주인공 ‘유디트’는 성서 속에 등장하는 유디트의 일화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린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 유디트는 옷을 벗은 채, 한 손에는 적장의 목을 들고 몽환적이고 희열을 느끼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유디트는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미인계를 써서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동침합니다. 적장이 한창 섹스에 빠져있을 때 그녀는 그의 목을 베지요. 클림트는 그녀의 모습을 승리감에 도취해 황홀경에 빠진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섹스의 정염이 묻은 것인지, 아니면 살인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해서 나오는 만족감인지 우리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소설 속의 유디트와 그림 속 유디트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 이후에 보이는 그녀들의 표정. 소설 속 유디트는 생기가 돌고, 그림 속 유디트는 승리감과 황홀경에 도취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섹스를 통한 육체적인 쾌락을 맛봤음에도 그녀들이 원하는 만족감은 다른 곳에 있는 듯합니다. 그림 속 유디트가 적장이 아닌 사람과 동침했더라도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지었을까요. 적장의 목을 베어야겠다는 그녀의 목적이 이뤄졌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겠죠. 소설 속 유디트도 마찬가집니다. 강요된 자살이 아닌, 그녀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기에 그녀는 생기를 띨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살과 타살. 죽음의 형태는 다르나 궁극적으로 죽음을 통한 욕구 충족을 말하려는 점에서 동일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당신은 지금 무엇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까. 물론, 소설 속 유디트처럼 극단적인 선택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자극적인 묘사와 표현은 우리에게 ‘삶의 만족감’이란 무엇인지 경각심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유디트는 타인에 의해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주체적인 삶에 만족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소설의 제목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역시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는 ‘주체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찾는 만족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