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윤 기자 (kimi3811@skkuw.com)

▲ ‘대안공간 루프’의 서진석 대표가 ‘무브 온 아시아’의 지향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 김태윤 기자 kimi3811@skkuw.com
 
북적이는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주택가 골목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보이는 4층짜리 건물. 바로 ‘대안공간 루프’다. 1999년 상수동에서 시작해 지하 갤러리를 거쳐 새로운 대안미술공간으로 거듭난 이곳은 거대 미술관의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신진 미술가들의 작품 활동을 돕는 비영리적인 공간이다. 이곳에서 주목하는 대안적 가치는 바로 ‘아시아성’. 이를 구현하기 위해 올해로 7회째를 맞이하는 ‘무브 온 아시아(Move on Asia)’ 프로젝트가 펼쳐지고 있다.

 

▲ 제7회 무브 온 아시아 포스터. / ⓒ대안공간 루프

 아시아인도 모르던 ‘아시아성’을 예술 속으로
우리가 배웠던 ‘세계미술사’를 떠올려 보자. 동양화의 육법, 인도의 굽타 양식 보단 낭만주의, 인상파, 그리고 다빈치를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우리는 ‘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미술사적 흐름이 소외된 서양미술사를 중심으로 배웠다. 서구와 아시아 문화에 상·하위 개념을 접목시키는 불균형적 시각이 강했던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하에서 ‘무브 온 아시아’ 프로젝트는 현대 미술이 잃어버린 ‘아시아성’을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것은 서구 문화와의 충돌도 대항도 아니다. 균형화된 바라보기를 통해 ‘조화’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다.
서구에 의해 급속한 근대화를 겪기 전까지 아시아 미술은 조화를 추구하는 큰 줄기 하에 ‘*골법용필’, ‘*기운생동’과 같은 회화적 특성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근대화를 거치며 이와 같은 아시아적 특성은 주체적인 발전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서구 문화와의 충돌 혹은 절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수동적으로 변해 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시아 미술은 폐쇄성을 지니거나, 정체성을 잃은 기형적인 형태를 띠게 됐다. 대안공간 루프의 서진석 대표는 “아시아성의 확립을 위해선 변증법적 관계가 아닌 주체성을 가지고 내부에서 발현되는 독립적인 창작 활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공동체적 전시, 비엔날레의 매너리즘을 극복하다
물론 지금까지 아시아 미술을 소개하는 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아시아 경제의 급부상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아트 페어와 비엔날레는 아시아 미술을 전면에 내세우며 ‘세계화된 아시아’를 꿈꿨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인 미술전은 아시아 미술을 소개하는 데엔 기여했으나 정작 아시아의 ‘진짜’ 모습을 조명하는 것에는 소홀했다. 비엔날레가 정부 혹은 지자체를 위한 문화 자본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양상을 뗬기 때문이다. 서 대표는 “그간 신자유주의 아래서 예술은 독립적인 기능을 하지 못했다”며 “비엔날레가 상업화되며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로 변모하는 것이 그 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무브 온 아시아는 거대 미술관이나 기존의 피라미드형 국제 행사들과는 달리 상하 위계 관계가 없는 수평적이고 공동체적인 전시다. 따라서 기획자, 작가 누구나 자유로이 발언하고 토론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급변하는 사회·문화의 흐름에도 순발력 있게 반응한다. 기존 국제 예술 행사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생 날 것의 아시아’를 조망하는 하나의 대안인 것이다.

 아시아 예술가들, 시대의 담론을 공유하다
프로젝트 전반의 진행 과정은 어떠할까. 매해 아시아 각국의 큐레이터들이 모여 각국의 사회·문화·정치적 상황을 토대로 공유할 수 있는 아젠다를 형성한다. 올해의 아젠다는 바로 ‘검열(censorship)’이다. 아시아는 근대화의 후발주자로 급속한 사회 변화와 함께 격동의 시간을 겪었다. 그 가운데 민주주의가 충분히 정착되지 못한 국가들에서는 사적 표현에 대한 국가 권력의 통제가 지속됐고,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인도·태국 등 아시아 각국의 큐레이터들은 이러한 양상을 펼쳐 놓고 비교해보자는 취지로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는 독재 정권하의 언론 탄압과 같은 직접적 검열에 멈추지 않고, 빅브라더가 없는 자기 검열까지 확장된다. 전시는 검열의 넓디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20여 편의 영상 작업을 보여준다. 은유적인 작품부터 해학적 혹은 암울한 작품까지 표현 방식도 매우 다양하다.

 자본 권력 향해 내미는 예술계의 도전장
자본의 비대화 아래, 비영리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예술이 독립적·공공적 기능을 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무브 온 아시아는 자본 권력을 향해 내미는 예술계의 도전장이다. 서 대표는 “네트워크가 하나의 해법”이라며 “지역에서 지역으로 동시성을 가지고 옮겨갈 때 권력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베트남에서 틀 수 없는 영상이 있다면 한국으로 그 무대를 옮기고, 한국에서 예산 압력을 받는 작품이 있다면 다른 나라의 스폰서를 통해 자금을 운용하는 것 등이 그 예다.
무브 온 아시아 프로젝트는 이제 아시아를 담고 세계로 움직(move)일 준비를 한다. 그간의 작업을 가지고 독일, 스페인, 뉴질랜드 등의 국가로 해외 순회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제작비를 받지 않고도 자발적인 참여를 개의치 않는 아시아 각국의 큐레이터와 작가들은 오늘도 ‘아시아 미술의 바로 서기’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세계 지도를 펼치자 보이는 각기 다른 모습의 아시아. 그 안에는 정신성, 합일론적 가치, 오랜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새롭게 생겨나는 예술적 연대가 있다. 무수한 영상이 들려주고 있는 아시아만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대안공간 루프로 떠나보자.

◆골법용필=동양화에서 쓰는 육법의 하나로 선인의 필체의 품격이나 골법의 습득을 비롯한 붓놀림에 관한 기법.
◆기운생동=동양화의 육법 중 하나로 천지 만물이 지니는 생생한 느낌을 표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