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개인적인 관심으로 어제 중앙도서관에서 조우성 변호사의 특강을 들었다. 조 변호사는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이란 책을 쓴 분이고 강연의 주제는 경청이었다.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 경청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결심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고 둘째, 경청은 말하는 사람에게 신체적, 감정적으로 기울임이라는 것이다. 傾聽의 傾은 기울다라는 의미인데 나는 그것을 엎어져서라고 해석하고 싶다. 말하는 사람에게 엎어져서 그 사람의 관점에서 편파적으로 듣는 것이 경청이다.
지난 몇 년간 나의 듣기 기술과 자세는 나아졌는가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다. 20년이 넘는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소득은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은 좋아졌을까? 두 자식은 사춘기 동안 아빠가 좋은 말벗이 되어주지 못한 채 대학에 진학을 했고, 내 책장에는 아직 읽지 못한 “부모와 아이 사이(하임 기트너 등저)”가 기한이 지난 독촉장으로 남아있다. 학생들에게 (아주) 가끔 좋은 강의였다는 말을 듣지만 “제 이야기를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학생을 만나면 인생의, 학문의 선배로써 으레 내 생각과 지식을 늘어놓는 것이 도움이 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학생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게 하고, 턱에 손을 괴고 눈을 마주보고 들어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내과의사는 의사가 된 지 몇 개월 안에 앞으로 평생 들을 모든 환자의 증상을 듣는다고 한다. 나머지 30년 이상은 같은 증상듣기의 무한반복이다. 환자가 말하는 것을 지겨운 반복으로 듣는 의사와, 환자가 진료실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오기 전에 마음을 고쳐먹고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리라 생각하는 의사 중에 우리가 어떤 의사의 진료를 받고 싶은지는 뻔하다. 건성으로 듣지 않고 자세히 듣다보면 어떤 아이의 증상이 일반 감기가 아닌 폐렴으로 판명될 수도 있는데 경청은 귀중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된다. 이 정도의 심각성은 아니지만 사서도 똑같이 건성으로 듣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대학도서관 사서는 어느 정도 경험이 생기게 되면 학생들의 질문 앞부분만 들어도 어떤 질문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건성으로 듣고 자세하게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엉뚱한 정보를 제시할 수 있고 그 사서는 물론 다른 사서에 대한 신뢰도 잃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상당수의 전문직에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주의깊게 듣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적인 듣기 기술은 말하는 것, 쓰는 것과 달리 배울 필요 없이 대부분 자연스럽게 습득이 된다.  하지만 경청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 먹는 것과 또 부단한 노력,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지난 몇 년간 우리 학교 교과과정에 의사소통에 대한 과목들이 체계적으로 개설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학생들이 다양한 조직에서 성공적으로 업무를 하는데 의사소통의 기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가장 기본이 되는 듣기 기술은 어떻게 배워야 할까? 일상에서 좋은 본보기도 없고 막상 가르쳐주는 곳도 없다. 경청이라는 과목을 만들어야 하는 주장은 하지 않겠다. 20대에 경청이 중요하다는 말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글을 읽는 동안 한 번 생각해보자. 핸드폰에 저장된 수십, 수백 개의 번호 중에 나의 이야기를 기꺼이 그리고 판단 없이 들어줄 친구가 한두 명이라도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학생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리라. 반대로 나는 친구의 말을 경청할 마음과 기술이 있는지도 물어봐야 한다. 어쩌면 사흘 동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사흘을 굶는 것보다 힘들 수 있다.
듣는 사람 없이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가까운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사정이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仁義禮智를 교시로 하는 성균관대에 왔으니 인간됨의 가장 기본인 경청을 실천함으로써 나도, 우리 학생들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삶에 더 다가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