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과캠 만남 - 박종호(건축공학 91) 동문

기자명 정재욱 기자 (wodnr1725@skkuw.com)

성북동 어느 허름한 작업실에는 이젤에 캔버스를 놓고 쉴 새 없이 붓질하는 박종호(건축공학 91)동문이 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화폭에서 찾는 그는 세상과 고독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날카롭게 하지만 따사롭게 주위를 응시하며 그림을 그리는 그를 만났다.

공대생에서 늦깎이 화가로 데뷔
남을 위한 창작 아닌
나를 위한 창작 하고파

사진 | 유민지 기자 alswldb60@

소년, 꿈을 스케치하다

단칸방을 전전한 유년 시절 박 동문은 생각 많은 관찰자였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초등학교만 여덟 군데를 다녔죠. 사회성이 길러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는 자연스레 두꺼운 세계문학 전집을 벗 삼게 됐다. “처음에는 무슨 내용인지 몰랐지만 두세 번 읽다 보니 의미를 깨우치게 되더라고요.” 동화 속 ‘피터 팬’을 꿈꿀 나이에 소년은 사람들 사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소설 ‘파리 대왕’ 같은 일이 아이들 세상에도 일어났어요. 이문열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폭력적인 지배구조 속에 아이들이 고개 숙이고 적응해야 했죠.”

그는 그저 하릴없이 살아야만 했던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지만 굴복하고 있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 부모님이 꿀을 오렌지 주스 병에 담아서 담임선생님께 가져다드리라고 했어요. 당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돈 봉투를 드리는 게 관행이었는데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이 주스 병을 보시고 ‘내가 이딴 걸 원하는 줄 아냐’고 노발대발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부모님이 선생님께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가져온 소중한 선물을 어떻게 ‘이딴 거’라고 표현하실 수 있냐, 이것이 선생님으로서의 자세냐”고 그는 대들었다. “우연히 옆을 지나가던 교장 선생님께서 도와주셨어요. 그 선생님을 나무라시며 일단락 지어주셨죠.”

그 사건 이후 박 동문을 평소 눈여겨보던 교장 선생님은 그에게 학생회장을 추천했다. 다만 그는 그 제안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학생회장에 출마하기 싫어서 울었어요. 제 성격이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모님은 제 성격을 바꿔줄 수 있겠다 싶어 적극적으로 권유하셨어요.”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용기를 낸 박 동문은 결국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그 과정에서 도전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소심한 성격은 고쳐지진 않았어요. 하지만 가난하거나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거죠.”

그는 선거 과정에서 함께 포스터를 제작한 미술 선생님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했다. “미술 선생님은 제가 졸업할 무렵 진지하게 부모님께 그림 그리는 것을 시켰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림을 배우지 않았지만 재능이 있다고 그러셨죠.” 하지만 그는 부모님의 간곡한 만류에 내면의 요청을 애써 외면하고 건축공학과에 진학했다.

제도 샤프 대신 붓을 들다

붓을 들고 싶었지만 박 동문이 먼저 들었던 것은 제도 샤프였다. “건축을 열렬히 원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열심히는 했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설계 도면을 스케치해서 내가 원하는 형태를 창작하는 시간이 좋았어요.” 과 친구들도 인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를 많이 이해해주고 좋아했다. 하지만 젊은 날 ‘데미안’ 같은 구도자를 만나고자 한 바람은 쉬이 이뤄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저 이 시스템에서 경쟁하는 것에 충실하다가 미친 듯이 노는 것 사이를 오가기만 하더라고요. 그래서 품격 있는 자들은 책 속에서 만나야만 했죠.” 건축 공부에도 흥미를 잃어갔다. “건축 설계가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분야더라고요. 그동안 말없이 관찰만 하며 살아왔기에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죠.”

남들은 취업하기 바쁜 4학년 2학기, 그는 미학 개론 수업을 들었다. “기말고사 직전에 그림을 직접 보면서 교수님이 미학적 해석을 하셨는데 뭉크의 ‘병든 아이’라는 작품을 보고 순간 온몸이 떨렸어요. 저 그림이 내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공명 때문에 쉽사리 흥분이 진정되지 않았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숭고미를 수업에서 체험하고 학교 앞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미술학원에 전화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찾아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곧바로 부천에 있는 미술학원을 찾아갔어요. 그 날부터 아르바이트 없는 날은 수업 끝나고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진로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그는 마구잡이로 질주했다. 하지만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어도 되는 법을 몰랐다. 대학을 다시 가야 하는 줄로 알고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었죠. 다행히 그때부터 집안형편이 조금씩 나아졌어요. 그게 저한테 조금은 행운이었죠.” 졸업 후 입시 미술을 준비하면서 모의고사 성적도 좋았기에 서울대 서양화과를 늦은 나이에 재입학했다. “제가 생각했던 학교생활과 많이 달랐어요. 공대보다 더 자유롭게 예술과 철학을 논하는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딱딱한 학교 분위기가 너무 똑같아 놀랐죠.”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실기실에 아침 일찍 나가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학원에서 데생을 가르치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 동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 아내가 임신하게 되어 일 년 반 동안 휴학을 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결혼과 동시에 그림을 가르치고 이후 동화책 그리는 일까지 하다 보니 학교생활이 엉망이 되었죠. 작가 생활에 매진하지 못해 도태될 것 같아 불안했어요. ‘이럴 거면 애초에 직장을 다녔어도 됐는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아내가 교사 임용이 되고 다시 붓을 잡게 됐죠.”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1년 동안 친구 2명과 같이 작업실을 빌려 생활했다.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 창작 스튜디오에 들어가면서 혼자 작업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나만의 색을 채우다

초기에 그는 돼지를 소재로 작업을 하며 사회에 관해 얘기했다. “돼지를 통해 ‘힘없이 다 빼앗긴 힘없는 존재’와 ‘통제당하지만 언젠가는 고개를 들 희망의 존재’ 사이의 복합적인 감정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돼지’를 그린 지 약 5년 후 이번에는 ‘아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제 자신을 아이들의 표정이나 제스처를 통해 만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울렁거림이 며칠을 가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그리기 시작했어요. 어떤 것은 마음에 와닿아서 딱히 그림기법을 바꾸지 않고도 여러 장 그려졌어요.”

박 동문이 애착이 있다고 말한 작품 ‘불꽃놀이’는 그의 개인적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하루는 아이들과 불꽃놀이를 보러 갔다가, 제 어린 시절 대구에 있을 때 가족들과 마당에서 불꽃놀이를 함께 본 기억이 떠올랐어요. 당시에 불꽃놀이가 아름답다기보다 슬픈 마음이 들었어요. 세상에는 저렇게 아름답고 예쁜 것도 많은데 내 가족은 왜 그렇게 끼니 걱정을 해야 하지라는 괴리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는 아직도 불꽃놀이를 보면 이와 비슷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불꽃놀이(Fireworks), 2015, Oil on canvas, 194x112.

그는 작품을 구상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스냅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다. “사진으로 수천 장을 찍고 그중 서너 개를 모으고 그것이 쌓이면 또 서너 개를 선별해요.” 그의 작품 ‘괜찮을 거야’도 그가 가족과 함께 공원에 놀러 갔다가 찍은 사진이 작품으로 이어진 경우다. “발아래 조명을 받으며 고개를 숙인 상태로 개미를 보던 아이 모습을 스냅사진으로 담았어요. 고개를 숙인다는 조형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죠. 항상 고개를 숙이고 배고파한 그때의 나에게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박 동문은 몇천 명이 지원하는 레지던시에 들어갔지만 혼자가 익숙한 그에게는 불편한 시간이었다. “같이 밥 먹으러 갔다 체하기도 하고 좋은 작업실에서도 작업할 마음이 안 생겨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럼에도 그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레지던시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장식품에 쓰이는 보기 좋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면 레지던시에 들어가 살아남으려 애쓸 수밖에 없어요. 한국 미술시장이 척박해 철학이나 개인사를 담는 작업들은 평가를 제대로 받기 쉽지 않기 때문이죠.”

매일같이 작업실에 출근하는 박 동문에게도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좋은 그림은 서너 개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끌어 낼 수 있는 힘이 있어요. 하지만 평론가, 기획자가 작품을 선형적으로 해석하거나 스스로 작품을 정의내리는 순간 내 작품이 예술이 아니라는 회의가 찾아와요.” 남들이 가는 길을 포기하고 택한 화가로서 제대로 된 그림 한 점 못 그리고 죽는 건 아닐지 그는 고뇌하고 있었다.
  
다시 빈 캔버스를 꺼내 들다

그는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고백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업실에서 독백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자신의 삶에서 깨달은 생각을 자유롭게 독백하겠다는 박 동문의 작품에는 보석과도 같은 새 생명의 이야기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박 동문은 올해 11월 쯤 혜화동 대안 공간 또는 대관할 수 있는 화랑을 이용해 새로운 개인전을 계획 중이다. 그는 이전까지 틀어박혀 자신만의 시야만으로 작업을 했더니 전시가 마니악했다고 자평했다. “이번에는 알고 지내던 큐레이터가 제 작품을 본 후 그분이 기획을 쓰고 전시를 주관하도록 해서 이전과 다른 시각의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각박한 사회에 사는 우리가 잊고 있던 가치를 화폭에 담아내고 있었다. 건축공학도의 삶에 회의를 품고, 인간다움을 고심하는 예술가 박 동문의 자유로운 독백은 계속될 것이다.

기사 도우미

◇레지던시 프로그램=예술가들에게 입주할 공간을 제공해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 입주 작가 프로그램이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