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채진아 기자 (jina9609@skkuw.com)

“나는 기술 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 방향은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추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작은 존재이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                                                                         
                                                                                  -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

자본화 논리에 매몰되지 않은 지속 가능한 기술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 다양해

오늘날의 적정기술은 기술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대한 고민이다.

기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다

4차 산업혁명으로 세상을 바꾸는 기술혁신이 날로 가속화되고 있다. 고도성장을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인간에게 성찰의 경종을 울리는 기술이 있다. 적정기술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문화적 △정치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이다. 적정기술의 원조는 인도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마하트마 간디다. ‘차르카’라는 손 물레를 직접 돌리는 그의 모습은 제국주의 열강의 기술이 아닌 손쉬운 인도 전통 기술을 보여준다. 간디의 영향을 받은 독일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슈마허는 자기 파괴적인 거대 기술로부터 벗어나 현지의 재료와 적은 자본, 비교적 간단한 기술을 활용하는 ‘중간기술’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 학자들이 ‘중간’이라는 용어가 자칫 기술적으로 미완의 단계를 의미한다고 생각될 수 있어, 적정기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적정기술은 특정 기술들의 집합을 의미한다기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기술, 그리고 그 기술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고민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작지만 큰 기술

개발도상국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고 원조하는 활동은 적정기술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개발도상국에선 정수 시설이 널리 보급돼있지 않아 비소(As)로 인한 수질오염 문제가 만연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 독극물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단국대 토목환경공학과 독고석 교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숯 활성탄과 비소 흡착제가 내장되어 있는 이동식 정수기를 개발했다. 전처리 필터를 통해 일차적으로 모래와 큰 입자를 우선적으로 제거하고, 활성탄 필터가 물속 유기물질과 오염물질을 흡착해서 수질을 개선하는 방식이다. 독고 교수는 “가정용 정수기는 가격도 비싸고 전기를 필요로 한다. 반면 이동식 정수기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약 2만 원의 가격에 무동력으로 수질을 개선하기 때문에 현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 개발에 그치지 않고 비소 흡착제가 부착된 샌드 필터 정수기 제조법을 가르치기 위한 세미나를 현지 공무원들과 함께 개최했다.

이동식 정수기 직결용 필터.

전기 부족 문제 또한 개발도상국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다. 2008년 하버드 공대 학생들은 심각한 전기 부족 문제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주민들을 위해 축구공형 발전기인 소켓(Soccket)을 개발했다. 소켓은 Soccer(축구)와 Socket(전기 소켓)의 합성어로, 이 공을 30분 동안 차고 놀면 3시간 동안 LED 전등을 켤 수 있다. 공 안에 내장된 시계추 모양의 장치가 축구 중 부딪힌 충격으로부터 전기를 모아, 운동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어 저장해주는 방식이다. 독고 교수는 “적정기술은 겉으로 보면 장난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작은 기술이지만 현지의 생존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큰 기술이기도 하다”라고 전했다.

축구공형 발전기 소켓(unichartedplay.com 제공).

참여로 확산되는 나눔과 배려

적정기술의 보급은 공학자의 손을 넘어 대중의 관심과 참여를 필요로 한다. 외부 전기 없이 촛불만으로 작동하는 LED 램프 ‘루미르C’를 개발한 소셜벤처 스타트업 루미르는 참여를 통한 적정기술의 확산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루미르는 지난해 세계 최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킥스타터(Kickstarter)에서 론칭 한 달여 만에 세계 56개국 1000여 명으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펀딩에 성공했고, 현재 국내를 비롯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해외에서 판매되고 있다. 대학 사회 또한 적정기술을 통한 나눔과 배려에 동참하고 있다. 서울대 적정기술 동아리인 ‘기술나눔단 VESS’는 전문 업체의 도움을 받아 난방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국내 독거노인들을 위한 난방 텐트를 개발했다. 이와 같이 크라우드 펀딩이나 대학생 봉사단의 원조 활동이 기술 개발과 더불어 적정기술 저변화를 위한 핵심적인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