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현(독문 13) 학우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1.

 
고성주 씨가 오래된 골목의 한 건축사무소의 문을 열고 넓은 홀에 발을 들인 것은 4월의 어느 오후였다.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이,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거짓말처럼 먹혀 버리고 말았다. 아치형의 창문으로 세시의 햇살이 새어 들어왔고, 노곤한 빛 속에서 먼지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사위는 너무도 고요했고, 적막이 고성주 씨를 무겁게 내리눌러 그는 자신마저 저 밖의 소리와 함께 먹혀 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쭈뼛쭈뼛,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조명도 없는 고풍스러운 홀 저편의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말투와 차림은, 흑단 나무 데스크처럼 세련되어서, 고성주 씨는 절로 주눅이 들었다.
 
아, 예, 저, 그것이......
 
하며 말을 흘리는 고성주 씨에게, 그녀가 일어나 다가온다. 목적도, 이름도, 예약 여부도 묻지 않고 그녀는 가볍게 그의 팔을 잡아 데스크 옆의, 똑같은 나무로 만든 문 앞으로 이끌었다.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가 문을 두드리며, 고객분 오셨습니다, 하고 안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들어와요, 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답한다. 고성주 씨는 문 위에 걸린 명판을 바라본다. 빛나는 동판에, 폐허 건축 제1과 상담실, 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여자가 육중한 사무실 문을 연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한 번 고성주 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성주 씨는 어쩔 줄 몰라 아이구, 감사합니다, 비슷한 말을 하고 조심스레 방 안에 들어섰다.
 
왼편의 창문에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어두운색의 벽지를 바른 방에는 화분 하나 없다. 벽면에는 금빛 테의 액자 속에 담긴 수많은 상장과 서류들이 걸려 있다. 마호가니로 만든 무거워 보이는 책상 위에, 신 반 석, 폐허 건축 설계과장이라는 검은 글씨가 권위를 가득 담아 새겨져 있다. 옆에는 언젠가 보았던, 그리스 신전 폐허의 축소 모형이 놓여 있다. 책상 뒤에는 양복을 빼입은 젊은 남자가 앉아 있다. 머리를 말쑥하게 빗어 넘긴 미남이다. 새하얀 피부에, 콧날이 오뚝하다. 그 짧은 찰나에 이 모든 광경을 눈에 담으면서도, 고성주 씨에게는 시간이 전혀 흐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 남자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손목의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고성주 씨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황망히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악수를 받았다.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소중한 고객이시니까요, 하고 말하며 손수 책상 앞의 안락의자를 빼내 주었다. 붉은 벨벳으로 덮인 비싸 보이는 의자에, 고성주 씨는 앉기가 망설여진다.
 
담배 한 대 태우시겠습니까? 하고 남자가, 고성주 씨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물었다. 고성주 씨는 은제 담뱃갑에서 조심스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남자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팅, 하고 라이터 뚜껑을 닫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다 싶을 정도로 적막한 방에 울려 퍼졌다. 말없이 둘은 한동안 앉아 담배를 피운다. 담배 연기가 불규칙한 모습으로 솟아오르다 부서지며 쉴 새 없이 모양을 바꾼다. 비로소 고성주 씨는 다소간 마음이 놓였다.
 
소개를 미처 드리지 못했습니다, 폐허 건축사무소 설계과장 신 반석이라고 합니다. 하며 남자가 명함을 건넨다. 그러나 고성주 씨에게는 되돌려줄 명함이 없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명함이 없어서...... 하고 말을 흐리는 고성주 씨에게 남자는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명함이 사람을 말해줄 수는 없는 거니까요, 하고 말하는 남자 앞에서, 고성주 씨는 자신의 초라한 행색이 너무도 부끄러워졌다.
 
저희 폐허 건축 사무소는 어떻게 찾아 주셨는지요?
 
아, 예, 그게 제가요, 사실 저 앞에서 그 뭐냐, 노가다를 좀 하는데, 아이구, 죄송합니다, 공사를 하는데요, 공구리도 좀 치고, 케이블도 깔고 하는데, 저기 바로 옆 골목이거든요, 뭐냐 건물을 새로 짓는대서요, 무슨 상가 건물이라던가, 허허, 여기서도 들리셨을지도 모르는데, 많이 시끄럽죠, 시끄럽구 먼지두 날리구 하는데, 이거 참 괜히 죄송스럽고 그래서......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저희 사무소를 찾아주신 고객 분이신데요, 저보다 연배도 높아 보이시구요. 하고,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 아닙니다, 아녜요, 이렇게 큰 사무실 일하시는 훌륭한 분이신데, 젊으신 분이, 제가 이게 편해서 그래요, 허허.
 
고성주 씨는 부끄러움과 당황 속에 두서없이 말을 흘렸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눈을 빛내며, 지루한 기색 없이 온전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래서 고성주 씨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요, 내가 어디꺼정 얘기했더라, 하여튼 이 골목을 지나가지고는 출근을 해요, 새벽부터. 근데 이 사무실이 딱 보이는 겁니다, 폐허 건축 사무실이라고. 폐허 건축 사무실이 뭐냐, 했죠, 첨엔. 건물을 짓거나 때려 부수거나 둘 중 하나 아닌가, 그렇지 않아요, 요것은 건물을 짓는다는 거여, 부순다는 거여, 요새 철거용역은 뭐 이름도 저래 세련되게 지어 놨는가, 했죠. 근데 퇴근하면서 보니까 사람들이 좀 들락날락 하대요, 것두 양복 쫙 빼입은 양반들이, 차도 비싼 차 앞에 딱 대 놓구요, 아이구 내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왔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이거 옷이래 봤자 딸년 졸업할 때 입었던 이 양복 한 벌뿐이라서, 저 같은 막노동꾼이 이런 데를 와도 되나, 싶었는데.
 
아닙니다. 찾아 주신 것만으로, 저희 사무실의 가치를 알아주신 건데요. 그 점 감사드리고 싶군요, 건축업을 하시는 동종업계 분이신데, 저희로서도 더욱 영광입니다.
 
사내의 맞장구에 고성주 씨는 점점 자신감이 붙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이 남자가 양해를 구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요, 제가 우리 반장님한테 한번 물어를 봤어요, 반장 이 양반이 이 근처라면 빠삭하게 잘 알거든요, 반장님, 저쪽 골목에 그 거기는 뭣 하는 뎁니까, 간판도 없고, 들여다봐도 창에 썬팅을 잘해놨는지 안에가 잘 보이지도 않던데, 쪼매난 동판에다 폐허건축사무소라고 쓰인 거기 말요, 하고 물었더니 반장님이 아 거기, 하시는 거라. 거기가 뭐 폐허를 지어 준다나, 하는 거요. 내가 그랬죠, 참 세상에, 폐허를 돈 주고 지어요? 그거 그냥 철거용역 이름 그럴듯하게 바꿔놓은 거 아니요, 하니 이 양반아, 요새 돈깨나 쓴다는 양반들이 집 마당에다 저거 하나씩 지어 놓는다는 거 몰라, 이러는 거예요. 내가 참 노가다만 벌써 30년을 가까이했는데 그런 소린 첨 듣는데요, 뭣 하러 비싼 돈을 주고 건물을 지어 놨다가 다시 때려 부순대요, 그 돈으로 그냥 용역 좀 사다가 부수면 되지, 뭣 하러 저렇게 삐까번쩍하게 건물을 지어놓고 사무소니 어쩌니 거창하게 이름을 붙여 논대, 하니 역정을 버럭 내요, 반장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고 씨, 가서 일이나 하라구. 근데도 계속 그게 맘에 맴돌아서요, 오늘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구요,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가 싶기두 하고,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고성주 씨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남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 모습에 고성주 씨는 조금 불안해진다. 말마따나, 돈도 없는 내가 이런 곳에 와서, 이런 정신 나간 곳에 와서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시간이 멈춘 듯한 공기가 그를 갑자기 무겁게 짓누르고, 그의 엉덩이 아래 비싼 붉은 벨벳이 갑자기 가시라도 돋아난 듯 불편해져 고성주 씨는 괜히 몸을 뒤척였다.
 
그렇군요. 잘 들었습니다. 예, 말씀해주신 대로, 저희는 폐허를 건축합니다. 물론 주 고객층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신 분들이시죠. 소중한 순간들을 폐허로 남기고자 하시는. 저, 왼쪽 벽에 사진 보이시나요, 최근에는 외국에서도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의 신흥 부자들에게서 말이죠. 시골의 영지에 어울리는 폐허 건축 의뢰가 대부분이지만, 고성을 폐허로 만드는 작업 역시 진행 중입니다. 이번 달에는 영국에서 7건, 프랑스에서 13건, 독일에서도 2건 정도가 들어와 있습니다. 예, 한국에서도 최근 기업 총수들을 중심으로 교외의 별장이나 심지어는 자택 내부 장식용으로, 물론 ‘장식’이라는 말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일종의 랜드마크를 지어달라는 의뢰가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럼 비용이 많이 드나요......? 하고 고성주 씨가 말을 흐렸다. 불안이 다시금 치밀어올랐다.
 
그 건에 관해서는 별로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금액은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저희 건축사무소에서 폐허를 창조할 때 주요한 판단 기준은 많은 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상담하시기 전에, 우선 저희 사무실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고성주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사무소의 최대 경쟁자는 바로 시간입니다. 많은 인력과 비용, 자재와 기술을 동원해서 해내는 일을 시간은 그저 묵묵히, 그러나 확실하게 해내지요. 그 솜씨는 장인의 솜씨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아뇨, 장인이라는 말로는 부족하죠. 이 세상에서 폐허의 창조를 해 왔던 것은 시간만이 유일하니까요. 이것은 물론 저희가 이 업계에 뛰어들기 이전 이야기입니다만. 어찌 되었던, 저희는 감히 시간과 경쟁하기 위해 이 사업, 폐허 건축에 뛰어들었습니다. 30년 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전 세계 12여 국에 34개의 분점이 있고, 업무 역시 매우 체계화되었습니다. 고객들에게도 인정받고 있고요. 저희의 많은 작품은 이미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과 경탄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요. 고성주 씨께서 ‘지었다가 때려 부순다’라는 말씀을 하셨기에, 괜찮으시다면 짧은 역사 강의를 하고 싶은데, 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희의 초기 작업은 아주 반대였거든요. 자재를 모아 먼저 폐허의 조각들을 만들어냅니다. 낡은 기둥이라던가, 금이 간 주춧돌, 반파된 조각상들을 우선적으로 제작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부가작업이 추가됩니다. 자재를 화학적으로 부식시키기도 하고,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깎아내고 마모시키기도 합니다. 회화나 유물, 조각상을 제작하는 데는 유수의 박물학자들과 미술학자들로 구성된 팀이 동원되기도 하고요. 그 후에는 지정된 터에 폐허를 세웁니다. 이 기둥은 어디에 눕히고, 이 조각은 어디에 세우고, 주춧돌은 어느 위치에 묻어야 하는지 등등을 결정하죠. 이 과정 역시 매우 지난한 작업입니다. 식생과 지형, 지질을 모두 고려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최근의 작업 양식은 ‘지었다가 때려 부수는’ 작업에 매우 가깝습니다. 가깝지만, 맞는 말은 아니죠. 저희의 파괴는 파괴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곧 창조이니까요. 저희가 이 방법을 채택한 것은, 이 방식이 가장 폐허의 예술, 즉 시간의 방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이죠. 무엇보다도 인위적이지 않고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의 폐허가 완성되는 겁니다. 원형이 없으면 폐허도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요. 그렇기에 기존의 방법은 예술적 측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매끄러운 말씨로 이야기하는 남자를, 고성주 씨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 내내 불붙은 담배를 들고만 있던 남자는 그제서야 한 모금을 깊게 빨고 연기를 내뱉었다.
 
의뢰와는 관계가 없는 얘기를 조금 길게 늘어놓아 죄송합니다만, 이게 저희 방침이라서요. 마실 거라도 좀 내드리겠습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고성주 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책상 뒤의 책장에서 위스키와 크리스털 잔 하나를 꺼내 고성주 씨 앞에 따랐다. 투명한 갈색빛의 액체가 청명한 소리를 내며 잔에 찼다. 문득 목이 말라 고성주 씨는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불타는 듯한 얼음이 목을 따라 흘렀다.
 
그렇다면, 저희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가 궁금하시겠지요. 왜 비싼 돈을 들여 이런 짓을 하는지. 잠시 이 모형을 보시겠습니까?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고대의 건축물이죠. 이제는 아무도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신탁도 받지 않고요. 신탁을 받을 사제는커녕 신탁을 내릴 그리스의 옛 신들부터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기둥만 남은 이 앙상한 흉물이, 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걸까요. 아무런 쓸모도 없고, 그 누구도 머무르지 않는데. 그러나 해마다 수천,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폐허만이, 시간에 맞서 싸워 이겨낸 인간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사라진 역사는 바로 이 대리석 기둥 속에, 오래 전 죽은 인간의 삶이 이 조각의 얼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죠, 폐허는 시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승리의 상징임과 동시에 패배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미처 지워 버리지 못한 과거의 역사와 삶의 흔적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에 의해 다시금 되살아납니다. 인간만의 위대한 능력인 상상력을 통해서요. 과거의 한 석공이 이 돌로 이 얼굴을 깎아내었을 때의 모습을, 신실한 신자가 이 제단에서 드렸을 기도를, 웅장한 대관식과, 사막과 바다를 건너 별로 향했던 교역상들을. 콜로세움, 파르테논 신전, 모아이, 피라미드......이 폐허들 사이를 거닐며 우리는 폐허를 통해 과거의 인간과 소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현재의 인간인 저희 건축 사무소는 폐허 건축을 통해 미래의 인간과 소통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무자비한 흐름에서 벗어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조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인간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열변을 토하는 남자의 얼굴은 표정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의 말에는 알 수 없는 광기가 서려 있어, 고성주 씨는 갑자기 오싹해졌다. 방 안에는 공기 대신 박제된 시간이 고여 있는 듯 같았고, 젊어 보였던 남자의 얼굴은 갑자기 나이를 짐작할 수 없어져, 고성주 씨는 세차게 눈을 비볐다. 어쩌면 술기운 때문일지도 몰라. 이번에는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고성주 씨는 남자의 담뱃갑에 손을 뻗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직 연기만이 이 방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잡설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죄송하군요. 이제 본격적인 상담을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이 말에 퍼뜩 고성주 씨는 정신을 차렸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해는 어느덧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의뢰하시고자 하는 장소와 폐허 규모는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그게, 종로에 있습니다. 장소는 저의 집이구요.
 
좋습니다. 집 내부에 장식하시려는 건가요? 여기 카탈로그를 한 번 보시면, 원하시는 항목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필요하시면 저희 인테리어 전문가와도 상담을 잡아 드리죠.
 
아뇨, 집 안이 아니구요, 저의 집을 폐허로 만들까 싶어서요.
 
대리석 조각마냥 표정이 없던 남자의 얼굴에 살짝 놀란 빛이 스쳤다.
 
자택을 말씀이신가요.
 
예, 이거 안 될까요?
 
아뇨,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이런 의뢰는 저희 사무소에서도 처음 받아 보는 의뢰라서요.
 
놀란 기색은 어느덧 사라지고, 남자의 목소리는 사무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좋습니다. 공사 예정일은 어느 때가 괜찮으실까요?
 
예정일이라, 하고 고성주 씨는 생각했다. 언제든 상관없었다. 집은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으니까.
 
아유, 그냥 편하실 때 해 주세요. 빠를수록 좋구요.
 
물론 그래야지요. 그렇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측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여러모로 준비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관청에서 공사 허가도 받아야 하고, 주택이라는 특성상, 주변 주민들에게도 협조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무엇보다도 자택을 의뢰하셨는데, 보통 저희는 사유지에서 폐허를 건축하고 폐허의 소유권은 의뢰자에게 있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집의 소유권 문제가 있지요. 자세한 상담은 저희 법률 자문이 해 드릴 겁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많은 법률 용어와 서명해야 할 서류로 이어졌다. 남자의 말을 고성주 씨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예, 아무럼요, 알아서 해 주시겠지요. 평생을 타인의 말에 이끌려 다니던 고성주 씨에게 있어 오늘 역시 의사도 의지도 없는 대화의 연장일 뿐이었다. 다만, 다만, 오늘만큼은 유독 마음이 편했다. 마침내 끝이라는 생각이었을까, 고성주 씨는 이상하리만큼 개운하게 집의 소유권 양도증서에 서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 저희 쪽 사람이 자택에 한 번 방문할 겁니다. 서류 작업은 걱정하실 것 없이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예, 그럼요, 알아서 잘 해주시겠죠, 허허.
 
이야기를 끝낸 고성주 씨에게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고성주 씨는 차갑고 단단한 그의 흰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아 악수를 했다. 손을 빼지 않은 채 남자가 일어나 고성주 씨를 문까지 안내했다. 무거운 나무문이 열리고, 문 옆의 데스크의 여자는 여전히 완벽한,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야 마치 꿈만 같군, 하고 고성주 씨는 길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영겁처럼 긴 시간을 걸어 폐허 건축 사무소의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비로소 시간이 다시 흐르는 듯 했다. 도로에는 차들의 행렬이 늘어서 있었고,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노상 자판에 눈을 빛내기도 하고, 삼삼오오 술에 취해 떠들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소음에 고성주 씨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소음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마치 건축사무소의 침묵이 그의 안을 이미 꽉 메워버리기라도 한 듯이.
 
2.
 
집으로 가는 길은 쌀쌀했다. 역에서 나와 한참을 걸어 주택단지의 오르막을 힘겹게 그는 오른다. 과일가게도, 동네 호프도, 세탁소도 이미 문을 닫았다. 편의점에서 그는 소주 두 병과 삶은 계란 몇 개를 사 언덕배기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저기, 그의 집이 서 있다. 곧 폐허가 될 그의 집이.
 
고성주
이복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른 종류의 침묵이 그의 안을 메운다. 공허라고 해도 좋다. 공허란, 질량도 부피도 없으나 사람의 안을 채워 진공 상태로 만든다. 이제 아무도 돌보지 않는 마당 구석의 텃밭도, 한때 그의 아내가 애지중지했던 영산홍 나무에도, 한때는 김치를 담았으나 이제는 먼지를 뒤집어쓴 고무 대야에도 공허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다.
 
고성주 씨는 불도 켜지 않고 마루에 주저앉는다. 방에 들어가기가, 그는 겁이 난다. 방에는 그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그는 부모님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언제나 - 눈이 오건 비가 오건, 날이 덥건 춥건 - 항상 이 툇마루에 누워 있었다. 평생을 삶은 계란과 소주로 연명하다가, 그는 죽었다.
 
그 아래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딸의 졸업식 날이다. 우리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고 그는 딸에게 언제나 이야기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그랬듯이. 술에 취해 있지 않은 날에는 아버지는 그에게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아버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는 어느 날인가 헛간에 숨어 있다가 폭탄을 맞아 헛간 채로 터져 돌아가셨다. 무너진 돌더미 속에 창백한 손이 삐져나와 있었어. 키는 작았어도 농사일로 다부진 분이셨는데, 돌더미 사이로 삐져나온 아버지 손은 너무도 가느다랗고, 창백해서, 툭 치면 부서질 것 같았다.
 
폐허 속에서 어떻게 그 시체를 수습했는지에 대해서는, 고성주의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고성주 씨는 그의 눈빛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달아났다. 예, 아유 그럼요, 알아서 잘해 주시겠지요. 평생을 작업반장에게, 학장에게, 시퍼렇게 어린놈에게, 술에 취한 회사원에게 그는 예, 아유, 그럼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간 함박집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말을 하는 여자를 만났다. 복순아! 하고 사납게 그녀를 보채는 식당 주인 앞으로 그녀는 헐레벌떡 뛰었고, 담배 연기를 사방에 뿜어 대는 건물주에게 그녀는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였고, 값을 깎으려 야채장수에게 얼굴 가득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에게 그는 말을 걸었다. 복순, 이름도 참 예쁘시네요, 하고 말하는 그에게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하나가 둘이 되었다. 아유, 그럼요, 제가 뭘 아나요. 그 말도 서로에게 서로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보다 쉽게 할 수 있었다. 트럭에서 야채를 팔 때도, 노가다판에서 공구리를 칠 때도, 술에 취한 손님을 업어 집 앞까지 바래다줄 때도, 도로에서 통신선을 깔다 지나가던 아파트 주민이 그에게 성난 눈초리를 보낼 때에도.
 
그 무렵 딸이 태어났다. 평생을 기어 간신히 골목 한켠에 마련한 집에 딸의 미소는 온 세상과도 같았다. 그러나 밖의 세상은 딸이 있는 세상보다 더욱 크고 차가워서, 이 작은 집의 온기를 지키는 것만도 그에게는 버거웠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바쁘게 흘러갔고, 그가 딸에게 말을 걸 때면, 어느덧 그 역시도 그의 아버지의 눈을 하고 있었다.
 
니가 우리 집안의 희망이다.
 
폐허를 바라보며 그는 이야기했고, 그를 바라보는 딸의 눈빛을 그로서는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가 죽던 날 그는 폐허의 꿈을 꾸었다. 폐허 속에서 아내의 가느다란 팔이 달빛 속에 빛나고 있었다. 지하상가에서 떡을 팔던 그녀의 작은 가게는 아주 깊숙한 곳에 있어, 불꽃 속에서 그녀는 제때 빠져나오지 못했다. 망연자실해 그는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누구에게 따져야 할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 채. 지역 상인회장은 고 씨, 미안하게 됐어, 그런데 자네 마누라만 죽은 게 아냐, 다들 장사고 뭐가 인생 아주 종쳤다구, 하고 침통한 얼굴로 말했고, 건물주는 길길이 날뛰며 어느 놈 가게에서 처음 불이 났는지 찾아내겠다며 벼르고 있었고, 보험사의 젊은 직원은 이거 안 되겠는데요, 정확한 피해액을 파악하는 게 좀처럼 어려워서 말이죠,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며, 구청의 공무원은 저희도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서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죠, 하며 차일피일 시간만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 앞에서, 그는 아이구, 예, 이거 죄송합니다, 거 바쁘신 건 알겠지만 최대한 빨리 해 주시겠어요, 어떻게 좀, 제 마누라가, 제 마누라가, 하고 말을 삼키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허망해 앉아 소주를 마시며 그는 딸에게 이야기했다.
 
니가 우리 집안의 희망이다.
 
희망이 너무도 버거워져 딸이 집을 나선 날, 그는 더 이상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부엌의 식기에도, 좁은 방 한 켠의 장롱에도, 딸아이가 처음 멘 책가방에도, 아내의 낡은 한복에도 추억이 켜켜이 쌓여 그를 잡아먹으려 했다. 달력의 페이지를 찢는 것을 그만두는 순간 추억은 공허가 되어 좁은 툇마루를 뺀 집 전체를 삼켜 버렸다. 그 추억을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놓아 보낼 수는 없었다. 추억을, 폐허 속에 놓아둔다면, 그 쓸쓸한 모습으로나마 잊지 않을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소주를 다 털어 넣는다. 추위도 느끼지 못한 채, 그는 툇마루에 웅크리고 누워 잠든다.
 
며칠 뒤 사무소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느라 지칠 법도 한데, 말쑥한 양복 차림의 그들은 지친 기색 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구, 요런 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거 제가 커피라도 좀 내드려야 하는데...
 
그거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예?
 
저희가 내부 구조도 알아야 도면을 그릴 수 있거든요, 괜찮으시다면 말이죠.
아이고, 예, 그러셔야죠. 저기, 좁으실 텐데 다 들어오실 수 있으실까요.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는 먼지 냄새가 났다. 다섯 명의 사내가 들어앉기에 방은 너무 좁아서, 그는 자리에 앉는 대신 부엌으로 가 낡은 컵에서 먼지를 씻어 커피를 탄다. 흘낏, 뒤를 돌아보니 그들의 눈이 사방을 훑고 있었다.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먼지가 쌓인 낡은 한복에서 가방끈이 해진 책가방으로, 아버지의 사진에서 딸의 졸업사진으로, 누렇게 벽지가 바랜 벽으로, 빗물 때문에 곰팡이가 슨 천장 모퉁이로. 고성주 씨가 애써 외면한 방을 그들이 보고 있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부술지 결정하기 위해서.
 
이거, 잘 마시겠습니다.
 
고성주 씨가 멍하니 들고 있던 쟁반에서, 남자가 넉살 좋게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어휴, 죄송합니다, 여기 다른 분들도.
 
맛이 참 좋네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남자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아녀요, 그냥 믹스커핀데요 뭘.
 
저희가 오늘 찾아뵌 것은, 우선적으로 설계 작업을 하기 위해섭니다. 대략적으로나마 측량도 하고 도면도 그려야죠. 주변 환경도 한번 살펴보고요, 주택가 한복판 의뢰는 저희도 처음 받아 봐서 주민들 반발도 예상되네요. 뭐 저희 사무소 법무팀 실력이야 알아주지만요. 소음이나 먼지 문제도 있고, 시청에서 서류 뗄 것도 많고......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 사무소에서는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부수적인 작업도 한번에 다 처리해드리니까요.
 
예, 알아서 잘 해주시겠죠, 저, 근데 금액은......
 
아, 자세한 견적은 뽑아 봐야 알겠지만, 이번 건은 저희 과장님이 공사를 일단 다 끝내고 보자고 하시네요.
 
예? 아니 그게.......
 
예, 아무쪼록 그저 걱정 마십시오. 맡겨만 주시면, 저희 쪽에서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저 맡겨 놓고, 알아서 잘하리라고 어렴풋이 믿는 것은, 그에게 있어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기에, 고성주 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3.
 
고성주 씨가 찜질방과 허름한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모든 일이 알아서 이루어졌다. 하루하루 집은 점차 폐허로 변해 갔다. 그의 낡은 집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허름한 담벼락을 앞에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자와 측량기를 들고 열심히 무언가를 재고 있기도 했다. 호기심에 고성주 씨의 집을 찾아온 이웃들은 폐허를 짓는다는 현장 요원의 설명에 더러는 아는 척을 했고, 더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며, 더러는 성난 얼굴로 고성주 씨에게 삿대질을 했으나, 고성주 씨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일 뿐이었고, 현장 직원의 설명에 곧 만족한 채로 돌아갔다. 하루는 공무원이 와서 고성주 씨에게 이것저것 캐물으려 했으나, 고성주 씨가 대답할 것은 거의 없었으며, 옆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를 대신해 주었다. 모든 것이, 아무쪼록 알아서 잘 진행되고 있었다. 고성주 씨는 그저 마당 구석에 버려진 고무대야처럼 덩그러니, 한켠에 놓여 있었을 뿐이었고, 마침내는 발길을 끊어 버렸다.
 
신반석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고성주 씨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날에서 한 달이 지난 즈음이었다.
 
고성주씨, 안녕하십니까, 저 폐허 건축사무소의 신 반석입니다.
 
아이구, 예, 오랜만입니다, 허허.
 
건축이 다 끝나서요. 완공식을 하려 하는데, 의뢰인께서 안 계시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오후 2시에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면 참석해 주십시오.
 
오랜만에 찾아간 집 – 의 폐허 – 앞의 좁다란 골목길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고성주 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기, 이분들은 다......
 
소개드리죠, 이쪽은 구청에서 근무하시는 김 주무관이시구요, 건축과에 계십니다. 이쪽은 문화재청에서 오신 분이시구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울신문 기자분도 오셨구요, 문체부에서도 몇 분 오시기로 했는데......
 
예?
 
아, 죄송합니다, 설명을 드린다는 게. 저희 건축사무소의 업적을 드디어 당국에서도 인정했습니다. 사실 늦다고도 볼 수 있죠, 외국에서는 벌써 폐허과도 따로 생겼을 정도니까요, 이번 프로젝트를 지자체에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검토했거든요.
 
그럼요, 서울의 한 골목의 낡은 주택가를 보존하기에 폐허만큼 걸맞은 형태가 또 있을까요. 아, 구청 건축과 김진호라고 합니다.
 
아이구, 예, 하며 고성주 씨는 영문도 모르고 명함을 받아들었다.
이 얼마나 대단하냔 말이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외국에서는 이미 다 하고 있거든요, 이런걸. 시에서 나서서 폐허를 건축하고 또 보존하고, 후세에 길이길이 남기는 거죠. 생명이 없는 버려진 폐허에 새로운 추억과 기억, 또 생명이 깃든다, 이거 멋있지 않습니까. 이런 걸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줘야 하는데. 이게 또 엄청난 관광 명소가 되거든요, 사진 찍기에도 좋고, 저기 뭐야 뮤직비디오 같은 것도 이런데서 찍으면 얼마나 좋아요.
 
구구절절 맞는 말씀만 하십니다, 하고 신반석이 끼어들었다. 이것도 다 고성주 씨가 맡겨 주시지 않으셨으면 있었을 수 없는 일이죠. 자, 한번 가까이서 보실까요.
 
왁자지껄한 사람들을 뚫고 신반석이 고성주 씨를 이끌었다. 영문도 모른 채, 고성주 씨는 그저 얼떨떨해 따라갈 뿐이다.
 
자, 어떠십니까. 최대한 원래 형태를 보존하면서도 낡아 보이도록 많은 공을 들였죠. 저기 지붕의 일부가 보이시나요, 서까래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노력이 꽤 들어갔습니다. 이쪽 부엌도 한 번 보시죠...... 아, 그리고 이번 공사의 대금은 저희 측에서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지자체에서 확실한 지원을 약속했거든요, 애초에 규모가 작은 공사다 보니 큰 비용이나 자재가 든 것도 아니었구요.
 
고성주 씨에게 신반석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폐허를 바라보고 선다. 낡은 창고도, 마당 한 구석의 장독대도, 깨어진 창문도, 앙상히 드러난 벽도 모두 저마다의 시간을 가진 채, 오후의 햇살 아래서 빛나고 있다. 거기에는 공허도 없다, 그저 오랜 세월이, 깨진 벽돌 한 장 한 장에, 무너진 담벼락과 기둥에 내려앉아 있을 뿐이다. 모든 폐허의 조각에서 그는 기억을 읽어낸다. 그것은 거기에 있다, 갈라짐과 깨짐 속에, 먼지와 조각 속에서. 고성주 씨는 말을 잃어버린다.
 
마침내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기까지의 기억은 희미하다. 몇 번의 악수를 하고, 몇 번 예, 예 하고 대답을 한 것 같기도 하다. 모두가 이윽고 돌아간 밤에, 달빛이 폐허 위를 은은히 비추고, 아직도 남아 있는 툇마루에 고성주 씨는 드러눕는다. 갈라진 벽과, 무너진 지붕 아래, 깨지고 금이 간 콘크리트의 폐허 속에서,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달빛 속에서 박제된 시간이 다시 살아나 춤춘다, 깨진 장독대 옆 시멘트로 된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은 아내가 이쪽을 돌아본다, 금이 간 담벼락 위에 딸이 위태롭게 앉아 노래를 부른다, 뱃속을 훤히 드러낸 방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본다, 돌더미 아래 파묻힌 먼지를 뒤집어쓴 아내의 낡은 한복이 결혼식 때의 붉은 꽃으로 피어나고, 유일한 혼수였던 자개장롱의 봉황이 날개를 편다, 이 모두가 살아 있다, 폐허 속에 누운 고성주 씨의 눈앞에 비로소, 그가 외면하고 두려워했던 그 모든 추억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아아, 이것이 바로 폐허의 예술이다, 비로소 고성주 씨는 깨닫는다. 깨달았기에 그는 울어버리고 만다. 그가 죽었다는 것을, 이 모든 추억과 기억이 이제는 폐허 속에 묻혀 버렸다는 것을, 그 또한 기억과 함께 폐허에 묻혀버렸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깨닫는다. 폐허 속에 박제된 시간은 그가 아닌 그의 다음에 올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그 또한 시간 속에 얼어붙어 버렸고, 박제되어 버렸고, 이제 그를 경험하고 추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오로지 미래의 낭만적인 추측 속에서만 그가 다시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갑자기 너무도 무섭다. 무서워져서, 그는 대문이 있던 자리를 통해 좁은 골목으로 뛰쳐나간다, 모퉁이를 돌다, 그는 우뚝 멈춰 선다. 발걸음을 돌려, 그는 그의 집도, 그의 폐허도 아닌 곳으로 걸어간다. 툇마루에 누워, 그는 폐허 속에서 너무도 포근하게 잠이 든다.

 

최유현(독문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