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민진 기자 (kmjin0320@skkuw.com)

 

 

 2008년 10월 31일 저녁, 한 암호화 기술 커뮤니티에 개인인지, 단체인지도 알 수 없는 사카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의 글쓴이가 10장 남짓의 논문을 올렸다. ‘비트코인:P2P 전자 화폐 시스템’이라는 제목이었다. 이 논문은 태풍의 눈이 되어 두 달 뒤, 21세기 가장 주목받는 암호 화폐 비트코인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현재 비트코인의 기반기술인 블록체인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을 기술 중 하나로 기대되고 있다.

‘폐쇄’가 아닌 ‘개방’을 택하다
블록체인은 장부를 분산시켜 거래 당사자 간의 ‘신뢰’를 확보하는 P2P(Peer to Peer) 신뢰 네트워크다. 비트코인은 이러한 블록체인의 P2P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암호 화폐다. 인터넷에서 사용자끼리 직접 데이터를 주고받는 P2P 모델은 ‘소리바다’, ‘토렌트’ 같은 서비스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방식이다. 하지만 P2P 모델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하는데, 바로 사용자 간의 신뢰가 보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웃사촌 간에도 신뢰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 사이의 신용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 때문에 근대 이후의 시장에서는 언제나 신뢰를 대신 보증해주는 제3의 기관, TTP(Trusted Third Party)가 필수적으로 존재해왔다. 은행과 정부가 TTP의 대표적 예다. TTP는 신뢰를 보증하는 방대한 거래 장부를 일정량의 수수료를 받고 운영한다. 그렇다면 TTP가 없는 P2P 상에서의 신뢰 관계는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블록체인이다.
블록체인의 신뢰 관계는 TTP와는 정반대로 ‘폐쇄’가 아닌 ‘개방’에서 나온다. 중앙 정보 시스템에서는 개인의 정보가 담긴 거래 장부를 TTP에 독점시킨 형태로 보안을 지킨다. 이와 달리 블록체인은 거래 장부를 모든 사용자에게 나눠서 보관한다. 이러한 블록체인의 특성으로 인해 블록체인은 ‘분산장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블록체인이 적용된 비트코인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비트코인의 모든 사용자는 P2P 네트워크에 접속해 동일한 거래 장부를 각기 보관하게 된다. 이 분산장부는 10분마다 갱신되고, 악의를 품은 사람이 장부를 조작할 수 없도록 과반수가 인정한 거래 내역만 기록된다. 이렇게 새로운 거래가 발생하면, 10분마다 거래 집합체인 블록(Block)이 채굴되고, 채굴된 블록은 기존 장부에 연결되면서 거대한 블록체인(Block Chain)을 형성한다.

일러스트 | 유은진 기자 qwertys@

블록체인, TTP의 한계를 극복하다
블록체인은 기존 중앙 정보 시스템의 TTP가 가진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블록체인의 주요 장점은 △투명성 △보안성 △비용 절감이다.
TTP에 모든 정보가 집중되어있는 중앙 정보 시스템과는 달리, 블록체인은 장부가 모든 사용자에게 맡겨져 투명한 거래가 가능하다. 보안성 측면에서도 높게 평가된다.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해킹하려면 과반수 이상인 51%의 장부를 조작해야 하므로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블록체인의 보안성은 거래에 참여하는 사용자 수가 많아질수록 더 증가한다.
블록체인은 비용 면에서도 효과적이다. 기존 금융회사는 거래 장부를 안전히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보안 서버를 구축하는 데 막대한 돈을 투자해야 했지만, 높은 안전성을 자랑하는 블록체인 내에서는 신뢰 확인 작업에 드는 과정의 비용이 절감된다. IT 중앙 서버와 보안 시스템을 구축하는 비용 역시 낮아진다. LG경제연구원이 지난해 8월 발표한 보고서 ‘블록체인, 비트코인을 넘어 세상을 넘본다’에 따르면, 투자 은행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할 경우 거래비용의 약 30%를 절감할 수 있다. 이용자 역시 블록체인을 통한다면 TTP에 지급해야 하는 수수료가 사라지는 경제적 이득을 얻는다.
이러한 특성들로 보안 전문가들은 블록체인 기술이 철학적이라고 논하기도 한다. ‘모든 참여자가 장부를 공동으로 관리하면 보안성과 공공성이 동시에 해결된다’는 블록체인의 역설적인 아이디어에 사회 전반을 꿰뚫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 블록체인 인터넷
1990년대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많은 이들이 소수에게 권력이 쥐어진 산업사회가 혁신되기를 기대했다. 분명 인터넷은 전 세계 20억 명의 인구가 정보에 접근하기에 용이한 시스템이었다. 위키피디아 같은 대규모 협업 방식을 가능하게 했고, 아웃소싱과 네트워크식 비즈니스 모델은 개발도상국 국민이 글로벌 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기업의 이익 추구와 정부 기관의 권력으로 인터넷의 판도는 교묘하게 바뀌었다. 정보의 재분배를 불러올 줄 알았던 인터넷이 오히려 권력의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구글은 사용자의 검색 기록을 조회해 그에 적합한 인터넷 광고를 띄우고, 인터넷 쇼핑몰들은 구매 내역을 통해 사용자가 어떤 성향의 소비를 하는지 분석하여 이윤을 창출한다. 실제 정보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등의 공룡 기업들은 비즈니스라는 명목으로 무수한 데이터를 통제하고 있다.
이렇게 인터넷의 정보 독점이 심화된 상황에서 블록체인이 갖는 의미는 크다. 블록체인이 그리는 큰 그림은 블록체인을 통한 기존 인터넷의 혁명이다. 블록체인 패러다임 내에서는 개인이 신원 명세와 데이터를 온전히 소유하여 프라이버시의 보안을 지킨다. 또한, 강력한 TTP의 도움 없이 가치를 창출하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금융에서 행정까지, 지평을 넓혀가다
블록체인 패러다임 연구는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금융 분야에서 강세를 보인다. 2015년 골드만 삭스, 모건 스탠리를 포함한 40대 글로벌 대형 은행이 미국 블록체인 R3과 제휴해 ‘R3CEV’라는 *컨소시엄을 구성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블록체인은 높은 투명성을 통해 토지대장, 투표, 의료 등 다양한 행정 분야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져온다. 예를 들어 현재 온두라스는 국가 토지대장을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기록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공무원이 토지대장을 조작해 시민들의 땅을 자기 명의로 옮기는 비리를 청산하기 위해서다. 또한, 투표 분야에서는 블록체인의 투명성을 활용하여 미국 텍사스 주 자유당과 유타 주 공화당의 대선후보 선정에 블록체인 전자투표를 실시했다.
이렇게 세계에서 다양한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활발한 데 비해,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늦은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블록체인 연구를 활성화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블록체인 협의회를 중심으로 컨소시엄 간 정보공유 및 제도개선 과제를 검토하고 있으며, 경기도는 올해 ‘따복 주민제안 공모사업’을 통해 처음으로 공모사업 심사에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대학IT연구센터 육성지원사업의 연구주제로 블록체인을 선정하여, 블록체인 전문인력 양성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블록체인학회 및 블록체인오픈포럼도 설립되어 올해 국내 블록체인 논의는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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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소시엄(Consortium)=공통의 목적을 위한 협회나 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