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장소현 기자 (ddloves@skkuw.com)

맹렬한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푸른 하늘 뭉게구름이 한 조각 여유를 선사하는 가을이 왔다. 문득 책 한 장을 넘기고 싶게 만드는 날씨 좋은 가을의 어느 날, <성대신문> 문화부는 ‘설렘 담긴 나만의 책 상자’가 배달되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덕인서림 책방 주인 백석민(57) 씨와 연세대학교 인엑터스(Enactus) 학생 네 명을 만났다. 학생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덕인서림과 상현서림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기자는 덕인서림에서 작업을 하는 연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신하연 씨와 동행하기로 했다.


‘가독성 좋고 설렘 가득한 책 주세요’, ‘책으로 사랑을 알려고 합니다’, ‘이별했어요’. 설레어함을 주문한 고객들의 요청사항은 가지각색이다. 일일이 요청사항을 확인해가며 책방 주인 백 씨의 통솔 아래 설레어함에 들어갈 책이 골라진다. “이거는 연애 소설인데 내용이 좀 가벼운 책이니까 이거보단 다른 책이 나아.”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백 씨는 어느 위치에 어떤 책이 있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까지도 술술 쏟아낸다. “사장님은 머릿속에 검색 장치가 있는 것 같아요.” 하연 씨는 그런 백 씨를 매일 봐도 신기하다는 듯 말한다.

덕인서림 백석민 씨와 연세대 인액터스 신하연 씨가 설레어함에 담을 책을 고르는 중이다.
사진 | 김민진 기자 kmjin0320@


“아, 이분. 제가 저번에 넣어드린 책이 별로 마음에 안 드신다고 엄청 뭐라고 하셨는데.” 하연 씨는 고객들의 불만사항까지 하나하나 기억하며 최대한 취향에 맞는 책을 선정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 그 고객한테는 이 책을 넣어줘요. 비싼 책이긴 한데 까칠한 고객이니까 이런 책 넣어줘야지.” 선뜻 좋은 책을 권하는 백 씨에게 하연 씨는 손사레를 친다. 백 씨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난 파는 게 목적이야.” 백 씨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그 책을 직접 상자에 담았다.
백 씨와 학생들이 좁은 책방에서 북적거리며 작업을 할 때 책방 주인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혹시 이 책 나오면 꼭 좀 챙겨주세요. 다음에 사러 올게요. 부탁 좀 드립니다.” 그렇게 세 시간 남짓 되는 긴 시간동안 중장년층 손님 다섯 명만이 책방을 들렀다. 하지만 그들 중 책을 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백 씨가 처음 헌책방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청계천 인근에는 육십여 군데의 헌책방이 있었지만 현재 남은 곳은 겨우 이십군데 정도이다. 그렇다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몇 달 전 한 매체에서 설레어함 취재 후 한 번에 1000박스의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지금 쉴 새 없이 바쁘지만 작업을 하는 모두의 얼굴엔 미소가 띠어 있었다.
“설레어함을 시작한 건 잘한 것 같아요. 젊은 취향을 알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 취향이 내 기준하고는 꽤 다르더라고.” 백 씨가 고르는 책 세 권 중 한 권은 고전인 경우가 많다. 젊은 세대가 주로 신작 위주의 책을 선호하는 경향을 알기에 설레어함 고객들이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게 돕기 위함이다. “이게 그래도 내 이름으로 나가는 거잖아요. 혹시라도 고객들이 받아보고 내용물이 미비하면 실망할 수 있는 거니까. 설레어함을 통해 이 서점의 이미지가 결정되는 만큼 더 신경 써야죠.” 

 

'설레어함'의 모습과 실제 주문 받은 택배요청사항
사진 | 김민진 기자 kmjin0320@

설레어함의 하루치 주문이 마무리됐을 때 쯤, 옆 책방에서 작업을 마친 다른 인액터스 회원들이 덕인서림을 찾았다. 요청사항에 맞는 책이 없어 마무리하지 못한 주문을 덕인서림에서라도 마무리하려는 하연 씨를 백 씨가 말린다. “오늘은 이만큼만 해. 좋은 책이 남은 것도 아니고. 좋지도 않은 책 막 넣어주는 건 아니야.” 청계천 헌책방 거리의 문은 대부분 저녁 일곱 시면 닫힌다. 백 씨는 여섯 시까지 함께 작업한 인액터스 학생들을 먼저 보내고 퇴근 직전 설레어함을 고객들에게 보낼 준비를 한다. 택배를 받아 열어볼 고객들을 생각하니 그의 손은 더욱 빨라진다.
노을이 청계천을 붉은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할 때서야 가게 문을 닫는 헌책 장인, 백 씨. 그는 내일도 오랜 세월 지켜온 그 자리에서 고객들을 위해 설렘 가득히 헌책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