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하영 기자 (melon0706@skkuw.com)

 

 

“제 소원은 친구들이랑 운동장,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것입니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임성준(14) 학생이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태어난 지 12개월이 되던 때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이 학생은 평생 자기 몸무게의 절반이 넘는 산소 발생기를 달고 다니며 살아야 한다. 면역력이 약해져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도, 친구들과 뛰어놀 수도 없다. ‘건강하자’고 구매했던 제품이 오히려 그들의 건강과 삶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생활용품을 파는 옥시레킷벤키저 현 RB코리아(이하 옥시)는 2000년 10월 ‘옥시 싹싹 New가습기당번’이라는 이름의 가습기 살균제품을 출시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자료에 의하면 옥시 제품을 포함한 20여 종의 가습기 살균제는 폐 손상 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2011년까지 연간 60만 개 이상 판매됐다. 이 제품들은 ‘99.9% 살균, 어린아이에게도 안전’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판매됐지만 소비자의 건강에는 이상 신호가 생겨났다. 2013년에서 2015년 사이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총 239명의 죽음이 가습기 살균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고했다. 지난 12일에는 태아에 미치는 악영향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등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2년 8월, 제품에 흡입 시 폐 손상을 유발하는 유독성 물질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가 포함됐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옥시를 포함한 다수의 기업들은 피해자에게 사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심각한 피해와 소비자·시민단체 등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에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옥시 사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에 옥시와 정부는 해당 제품을 판매 중단시키며 피해자들을 만나고 피해자 보상책을 내놓는 등 뒤늦은 대처를 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옥시 제품 불매운동 캠페인을 진행중이다.
(c)참여연대 홈페이지 캡쳐


기업윤리의 부재
옥시 사태는 근본적으로 기업윤리를 지키지 않아 발생했다. 사회에 미칠 영향은 고려하지 않고 이익의 극대화만을 목표로 하는 기업들의 행태 때문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수차례 성분 공개를 요구받았음에도 5년 동안 침묵하며 소비자를 외면한 태도는 소비자의 분노를 심화시켰다.
기업의 올바르지 못한 대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검찰은 옥시에 이어 △롯데마트 와이즐렉 가습기 살균제 △세퓨 가습기 살균제 △홈플러스 가습기 청정제 등의 제품도 폐 손상의 원인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중 사망피해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옥시는 지난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과했지만 3, 4등급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는 미리 연락하지 않아 비난을 샀다. 롯데마트와 홈플러스도 진정성 없는 사과로 피해자와 소비자의 공분을 가져왔다. 현재 옥시는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소비자들은 이미 등을 돌린 상태이다.
영국의 본사인 레킷벤키저도 제품의 인체 유해성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영국 본사가 한국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을 전혀 몰랐을 가능성은 적다. 소비자들이 피해를 호소했던 2005년 이후 본사에서 파견된 영국의 전ㆍ현직 대표들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경영에 관여했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다국적 기업인 옥시 본사와 지사의 서로 다른 기준도 이번 비극의 원인이다. 가습기 살균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판매됐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살균 기능이 있다면 인체에 무해하다는 증거자료를 제출해야하기에 제품 판매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공산품안전관리법’의 허점으로 인해 살균제를 세척제의 용도로 허용해주었다. 나라에 따라 다른 법적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저가형 가구와 액세서리, 주방용품 등을 생산 및 판매하는 ‘이케아(IKEA)’의 경우 같은 글로벌 다국적 기업이지만 옥시와 달리 규제가 가장 강한 나라의 기준에 맞춰 동일하게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한다. 우리나라의 친환경 목재 규제는 유럽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환경규제가 강한 유럽의 기준에 맞춰 제품을 생산해 전 세계에 동일하게 판매해왔다. 반면 옥시는 본사와 한국 지사의 원자재 물질 공개에 있어서도 기업 경영기준이 달랐다. 본사는 ‘2015년 지속가능보고서’ 에서 2020년까지 자사 제품의 원자재 물질을 100% 공시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우리나라에 적용되지 않았다. 

 


정부 관리 소홀·연구 윤리 의혹
2011년 문제가 된 PHMG의 유해성 심사가 법적 제재의 부재로 미흡하게 처리됐다. 2012년 해당 물질이 들어간 제품은 산발적인 규제 아래 어느 부처에서도 제대로 관리받지 못했다. 2016년 이후에서야 수사가 착수되었지만 여전히 피해자 가족들이 낸 민사소송에서 정부는 개인과 기업의 문제일 뿐,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반발이 계속되고 있다.
연구 윤리의 문제 또한 옥시 사태를 더욱 심화시킨 요인 중 하나이다. 옥시가 자사 제품에 유독물질이 있다는 연구결과에 반박하기 위해 제출한 결과보고서를 두고 공방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연구자들이 연구윤리에 부합하는 검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다량의 생활용품에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의 걱정은 날로 커지고 있다. 옥시와 몇몇 타 기업의 가습기 살균제에서 흡입 독성 물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화장품, 건강보조식품 등의 화학적 제품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소비자들의 능동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