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장지원 기자 (wontheph7@skkuw.com)

 

▲ △알바연대 △청년유니온 △패션노조가 ‘2014 패션업계 청년착취대상 시상식’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청년유니온

'열정페이’ 개념의 직접적 발원지는 소위 ‘도제식 노동’으로 불리는 특정 문화산업들이다. 이들의 노동환경은 창작과 노동의 경계가 모호하고 현장에서 오랜 숙련을 필요로 하는 특성상 일반적인 고용계약이나 노사관계와는 다른 관행 속에서 형성됐다. 예술을 꿈꾸는 지망생이 넘치는 노동현장에서, 막내 스태프는 스승이자 고용주인 선생님들에게 감히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이 종종 화제가 되더라도 이미 자리 잡은 관행이라 어쩔 수 없다고 일축되기 십상이었다. 급기야 새로 생겨난 신산업도 이를 답습했다.
그러나 자체적인 극복 의지와 그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 SNS의 열정페이 열풍과 맞물려 주목받고 있는 영화계 표준 근로계약서 도입이나 패션계 공론화 역시 그들의 자정 노력 끝에 탄생했다. 한국 영화계에서는 70년대에 이미 스태프들이 노조 설립을 고려한 전적이 있지만, 처우 개선 요구가 본격화된 것은 90년대 영화산업 규모가 팽창하면서다. 꾸준한 공론화에 힘입어 2007년 출범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의 선결과제는 주먹구구식 경영을 극복하기 위한 제작 환경 합리화·표준화였고, 2011년 제정된 표준계약서는 그 결실로,  법정 근로시간 준수,  초과 근무 시 수당 지급,  안정적인 임금 지급,   4대 보험 가입 의무화,  휴식시간 보장 등을 도입하고 합리적 수당 계산의 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강제력이 없어 제대로 지켜진 영화는 손에 꼽았다.
지난해 2월 개봉한 권칠일 감독, 명필름 제작의 <관능의 법칙>은 표준계약서를 적용한 첫 영화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뒤를 이은 것은 영화계의 주도적 투자·배급사인 CJE&M의 <국제시장>으로, CJE&M은 2013년 8월부터 자사가 투자·배급한 모든 영화에 표준계약서를 작성하겠다고 나서 전환점을 마련했다. 현재 영화계의 목표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 개정안을 통해 표준계약서를 의무화하고, 여러 영화근로자 단체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비법이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영화계에서는 논의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이어온 반면 패션계에서는 최근까지도 처우 개선 요구가 비교적 미진했으나, 지난해 말 패션노조가 등장하면서 빠르게 공론화되고 있다.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한 패션노조는 업계 최고 거물인 이상봉 디자이너실을 정면으로 겨냥하며 이슈를 주도해나갔다. 이들은 ‘청년착취대상’ 퍼포먼스 이후 일주일 만에 이상봉 디자이너로부터 사과문을, 디자이너 연합회로부터 ‘혁신하겠다’는 입장문을 받아낸 데 이어, 22일 만인 지난 1월 말 연합회 위원들과 대면해 앞으로 이어질 대화의 장을 열었다. 이처럼 빠른 성과에 대해 패션노조 대표는 “청년 세대의 현실이 가시화된 사회적 배경에 힘입었다”면서도 “작은 힘으로도 터트릴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문제가 곪아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앞으로 구체적인 문제제기에서도 추진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영화계와 패션계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은 사뭇 다르다. 그러나 둘 다 노동환경 개선에 대한 공감대와 문제제기가 기반이었다는 점은 같다. 이들의 노력이 영화계와 패션계의 노동환경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킬지,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